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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연구

② [조선근대사·일조관계사] 조선·일본의 ‘경계’— 쓰시마를 살다간 조선인

작성자 몽당연필
작성일 19-10-11 13:32 | 17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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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본의 경계’— 쓰시마를 살다간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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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알려지지 않은 재일조선인사를 향한 시선

재일조선인의 뿌리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있다. 식민지 시기에 조선인은 중추 산업이 많은 도쿄·오사카·히로시마·야마구치·후쿠오카 등 도시에서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재일조선인의 역사라고 하면 우리는 도시의 조선인 노동자를 떠올린다. 하지만, 일본 전국의 도서관과 자료관을 돌며 조사를 하자 농촌이나 도서지역 등에도 조선인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중에서 특히 내가 관심이 갔던 것은, 조선반도에 가장 가까운 쓰시마에서 살았던 조선인의 역사였다. 쓰시마는 조선과 교류한 섬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에도 시대 쓰시마 번()은 조선왕조와 부산 왜관을 매개로 교역을 하고, 조선통신사나 조선어 통역, 표류민 송환 정책 등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현재도 쓰시마는 한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북적이고 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쓰시마는 일본의 대륙팽창 기조 아래 국방의 최전선이 되었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에 저항한 의병장 최익현이 쓰시마에 유폐되어 숨을 거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1)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쓰시마는 내지와 외지를 나누는 경계가 되어 패전 후에는 동아시아 냉전 속에서 다시금 국방의 최전선이 되었다. 지금도 쓰시마에는 한국 관광객을 환영하는 반면에, ‘한국인 사절이라는 간판을 달고 혐오감을 드러내는 카페가 있는 등, ‘교류혐한이 공존하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이러한 쓰시마에서 많은 조선인이 살았지만, 그 실태는 단편적으로만 밝혀진 상태였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나는 정영환 씨, 미야모토 마사아키 씨, 히와 미즈키 씨와 함께 근현대 쓰시마에서 재일조선인과 현지 사회에 관한 공동 연구를 2013년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2) 이번 기회에 그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식민지 시기 쓰시마의 조선인

쓰시마에는 언제부터 조선인이 살기 시작했을까.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 전에는 나가사키 전체에서 30명 밖에 없었던 조선인이 강제병합 후인 1911년에는 쓰시마에서만 조선인 인구가 177(그중 여성 2), 1920년 통계 조사에서는 819, 1925년에는 1,899(여성 331)으로 나날이 증가했다. 중일전쟁 이후 1940년 통계 조사에서는 조선인 수가 6,547(남성 4,147, 여성 2,400)에 달했다. 여성 인구의 증가는 조선인 해녀 수가 많았던 이유도 있지만, 가족이 다 함께 생활하는 사람이 늘어난 점도 원인으로 생각된다.

쓰시마에 사는 조선인들은 경상남북도·전라남도 출신이 많았다. 직업은 초반에는 엿장수가 많았지만, 점점 임업(숯 굽기), 어업이 가장 많아졌다. 쓰시마 북부에는 산속에 들어가 살며 숯을 굽는 조선인들이 많았으며, 조선반도·일본 본토 이출 목적의 숯 제조에 종사했다. 어업 종사자도 많아서 조선해역에 강한 영향이 있었던 외지인(야마구치·히로시마 출신자가 다수)에 의한 오징어 낚시나 가공업을 중심으로, 안에서는 불법 고기잡이 조직’(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한 불법 채취)의 일원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제주도 출신 해녀도 많았다. 제주도는 당시 일본 제국 영내에서 최다 해녀 수를 자랑했는데, 쓰시마는 최고의 돈벌이 지역이었다. 내지보다 임금이 저렴하고 노동 시간이 긴 데다가 배와 뱃사공을 필요로 하지 않아 채취 비용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숯 제조에 종사한 조선인의 생활은 궁핍했다. 숯은 산장의 감독관이 산주와 계약을 맺고, 조선인 인부는 감독관에게 식비와 용돈마저 떼먹히면 손에 쥐는 돈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숯을 굽는 일은 중노동이어서 어느 정도 벌채를 하고 나면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떠돌이 생활 끝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산속에서 쓰러져 죽은 조선인도 있었다. 감독관-부하 사이에 가혹한 수탈과 차별이 있어 그로 인한 마찰·충돌도 비일비재했다. 일상에서 조선인과 접촉할 일이 적은 현지 사람들 사이에는 소문이나 보도에 의해 차별 선동적인 흉악한 조선인怪鮮人이미지가 유포되었다. 나가사키 경찰 당국은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인이라는 의미-역주)의 관점에서 조선인 단속을 강화하고, 세계 공황을 배경으로 한 조선인 도항관리체제를 강화한 이후에 쓰시마로 밀항단속도 강화했다.

중일전쟁 이후 쓰시마에도 전시강제동원이 시행되었다. 이미 지적된 바 있는 동방아연쓰시마광업과 다케시키 특공기지 건설 외에도, 도요사키 히다카쓰항의 요격용 어뢰정의 격납기지 건설 작업에 종사한 조선인이나 전쟁 말기에 군사적 요충지에 배치된 조선인 병사에 관한 증언도 있다.

 

해방 후의 쓰시마와 조선인

1945년 해방 후 쓰시마에서는 4000명가량이 조선에 돌아가, 1960년 전후까지 조선인 인구는 2000명 정도로 감소했다. 생업은 숯 제조와 수산업이 여전히 많았으며,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궁핍했다. 60년대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국사업이나 일본 다른 지역으로의 전출로 인구는 급감, 70년대에는 300~400명 정도가 되었다. 한편, 패전 후 일본과 조선의 분리로 인하여 46년 이후 쓰시마는 조선에서 다시금 일본에 오려고 하는 조선인들에게 관문이 되어 쓰시마의 밀항경비체제는 강화되었고, ‘밀항자 사냥에 자경단과 도민도 가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쓰시마에서는 이전부터 거주하여 숯 굽는 일 감독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 해방 이후 쓰시마에 온 사람들,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에서 파견된 활동가들에 의해 1946년 말 조련조직이 결성, 조련쓰시마본부가 설립되었다 조련쓰시마본부는 숯 종사자의 경제적 이해를 대변하고, 영업세 철폐와 협동조합 설립에 의한 중간착취 제거를 추진하면서 도내 각지의 조선인 아동을 위한 학교를 만들었다. 하지만 1949년 조련해산·학교 폐쇄는 쓰시마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민단도 결성되었다.

그 후 쓰시마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쓰시마본부가 결정된다. 1934년에 쓰시마에서 태어난 신정수 씨는 1972년에 쓰시마본부위원장에 취임하여 쓰시마본부가 없어지는 1986년까지 부임했다. 신 씨의 귀중한 증언은 2】에 수록되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신창우 1970년생. 도호쿠대학 공학부 졸업 후, 히토츠바시대학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호세이대학 사회학부 교수. 주요 저서로 『식민지 조선의 경찰과 민중세계』(도서출판선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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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쓰시마 슈젠지에 있는 의병장 최익현의 순국비’(필자 촬영)

【2】 <근현대 쓰시마의 조선인과 현지 사회식민지 지배·냉전의 경계의 성격을 다시 묻다> (오하라 사회문제 연구소 잡지 706, 2017 8)

히와 미즈키 <메이지 시기의 쓰시마와 조선반도> / 신창우 <식민지 시기 쓰시마의 조선인> / 미야모토 마사아키 <일본 패전 이후의 쓰시마를 둘러싼 조선·한국인의 재주·이동> / 정영환 <쓰시마 재주 조선인의 해방5년사> / (증언 해방 후 쓰시마의 조선인 생활과 운동신정수 씨에게 묻다)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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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케치에 있는 옛 쓰시마 요새중포병연대 터. 케치 초등학원 소재지는 연대의 니시와키에 있던 구 육군병원을 건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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