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인연구
③ [재일조선인사] 그 아픔을 누가 달랠 수 있을까 – 관동대학살의 정신적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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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픔을 누가 달랠 수 있을까 – 관동대학살의 정신적 흔적
박해와 왜곡 속에서
나는 2002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에는 납치문제를 계기로 과거의 전쟁을 둘러싼 ‘피해자의식’에 기초한 국민주의가 확산되고 조선민족, 특히 북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거나, 보여졌던 재일조선인과 그 역사가 박해/왜곡되는 일이 눈앞에 일어나고 있었다. 조선학교와 학생을 향한 박해, 총련 탄압, <재특회>나 ‘혐한류’에 의한 재일조선인 역사에 대한 수정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학부생 시절 열정을 가지고 했던 공부를 통해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던 문제의식ㅡ90년대의 민족적학대로 인한 지울 수 없는 정신적 흔적에 조금씩 마주하게 되었고, 그것은 곧 해방을 위한 실천의 시작이기도 했다.
대학원생 시절은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대학살(이하 관동대학살)에 대해서는 희생자 수를 축소하고 생존자의 증언을 왜곡하면서 ‘테러리스트’를 처리하는 건 국가의 ‘자위권의 행사’라는 정당화론이 판을 치고, 이제는 도쿄도지사가 학살 희생자를 재해 사망자에 ‘통합’하면서 추도사를 보내는 것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한편에서는 역사왜곡에 대항하는 세력도 힘을 잃고, 8~90년대 이후의 전쟁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묻는 것을 ‘반일 내셔널리즘’으로 여기며 거부하는 움직임이, 특히 연구/실천에 있어서 ‘반면교사’로서 일본인 자유주의 언론, 지식인들이 전면에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우리’를 공부하는 어려움
이런 상황 속에서 이번 연재의 부제는 내가 연구원에 있으면서 자주 생각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일본의 학문 체제의 영향 아래서 ‘우리를 공부’하는 것 자체가 어려움이 따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활동은 어쩔 수 없이 시장의 논리와 연결되어 있어서 ‘먹고 살 수 있는’ 연구 주제, 학회에 ‘팔리는’ 연구방법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연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업적주의에 빠진 젊은 동포 연구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상황은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식민지 출신의 연구자가 자신을 갈아 넣으며 연구한, 주변에서 중심을/피지배에서 지배를 비판하는 학문 또한 ‘선진국’/과거의 종주국 지식인들에 의해서 현실의 비대칭적인 관계성을 사상되면서 ‘소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러한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저항일 수 없고, 무엇보다 정세에 따라서 재생산 되어온 운동의 사상과 실천에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공부’할 때 항상 따라오는 문제다.
관동대학살을 둘러싼 재일조선인사
나 자신이 경험한 바도 있기에 식민지주의의 폭력을 당한 사람들의 정신적 흔적을 연구하고 싶었다.
1세들의 증언을 모으며 재일조선인이 겪은 가장 큰 식민지 범죄인 관동대학살을 주제로 정하고, 조선인에게 학살이란 어떤 폭력이었는지, 학살 이후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등의 질문을 통해 문제에 접근했다.
최근의 젠더론, 기억론의 시점의 학살 관련 연구가 ‘전후역사학’의 내셔널리즘 상대화론에 기초한 일국사적인 일본사 연구에 빠져있는 상황 속에서, 종주국ㅡ식민지의 관계에서 학살을 다뤄왔던 앞선 연구들의 문제의식을 계승해서 조선인의 동향 연구를 더 해나갈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폭력과 정신적 피해라는 시각은 오히려 F.파농이나 쿠로가와 요지 등의 일부 정신분석의의 임상 보고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카지무라 히데키가 60년대의 학살이나 ‘황국신민화’ 정책은 재일조선인에게 직접적인 정신적 폭력으로 기능한 것을 지적하였지만, 역사학에서 이 주제는 아직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나는 우선 학살에 의해 받은 정신적 피해로서의 공포의 감정, 피난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다양한 신체적 행동에 드러난 것들을 추적했다. 군의 주도 아래에 학살이 자행되었던 요코하마에서 석탄을 운반하는 배 안에 필사적으로 몸을 숨긴 윤OO, 테라지마 경찰서에 구속되어서 ‘양/불령선인’을 ‘선별’당하는 정신적 학대 속에서 도망친 조OO, 자신이 조선인인 것을 끝까지 숨기면서 살아간 황OO 등, 많은 이들을 만났다.
다음으로 학살 이후의 삶에 대해서 조사했다. 고향 사람이 눈 앞에서 참수 당하는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이번에도 조선인이 당할거야’ 라고 중얼거린다는 문OO, 작살에 찔린 왼쪽 다리의 통증 때문에 20년 이상 악몽에 시달린 조OO. 행방불명자나 생존자의 가족 안에서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트라우마, 그리고 유족들의 자살.
나는 그들의 삶을 마주하는게 너무나도 힘들어서 몇 번이고 연구를 중단했지만, ‘그 아픔을 누가 달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묻기 위한 연구를 해나갈 필요가 있음을 강하게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연구는 ‘식민지주의의 폭력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서 정신적 피해 문제의 시점으로 대답해나가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이번 주제를 재일조선인사 연구와 접목하면서 동포의 생활과 운동에 학살문제가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는 지에 대한 물음도 제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해방전후 시기에 나타난 조선인의 일반적인 움직임ㅡ강제연행현장으로부터의 도망, 고향으로의 귀환, 조선인 밀집 지역/민족단체의 결성도 학살의 공포가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고, 그러한 감정/행동이 해방 직후의 재일조선인운동, 학살 책임 추궁에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등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을 운동사/정치사와의 관련 속에서 생각해 나가야 할 과제다.
이것은 기존의 민중사/사회사 안에서 생활주의를 분석의 기조로 한 ‘일상’의 질서를 중시하면서, 식민지 범죄와 민중생활, 민족운동을 떼어 놓고 생각하는 연구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서냉전 붕괴 이후, 이항대립적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 지배ㅡ저항의 영역을 피식민자가 받은 폭력과 그 정신적 흔적이라는 시점에서 재조명하는 이번 연구는 재일조선인의 식민지 경험을 재고하고, 아직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재일조선인사에서 관동대학살이 갖는 역사적 의미’ 를 해명해 나가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나가고 싶다.
정영수 1983년 출생. 도치기조선초중급학교, 이바라키조선초중고급학교, 조선대학교 문학역사학부 졸업 후, 도치기 초중급학교에서 교원. 그 후, 도쿄외국어대학원 박사 과정을 단위취득진학, 조대연구원을 거쳐서 조대역사지리강의 조교. 현재 조대역사지리강좌 조교. 논문으로 <관동대학살사건>과 <식민지 지배 책임 추궁ㅡ해방직후 재일조선인운동의 실적>, <기록집 관동대학살 시기의 조선인 대학살과 식민지 지배 책임>(조선간제 연구센터 편저)

쿠도오미 요코<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의 진실’>, 산케이신문출판, 2009년. 최근의 학살수정주의의 근원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사회과학회의 선생님들과 함께 (7월 26일 연변에서 열린 ‘조선반도연구학예회의2019’). 필자의 보고를 들은 근대사연구실장(오른쪽)은 “정신적 흔적이라는 피해상은 일본의 과거 청산 안에서 꼭 다뤄져야 한다”고 강하게 코멘트를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