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연필 소식
2022 몽당연필 장학생 수필
- 2022 장학생 수필 합본.pdf(537.7K)[5]2023-02-03 17:14:02
본문
몽당연필에서는 2020년부터 한국에 유학중인 재일동포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사업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재일동포 유학생들이 조국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도록 경제적 어려움을 덜고, 장기적으로는 재일동포 및 조선학교의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인재를 육성하는데 그 취지가 있습니다.
2022년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던 학생의 수필을 공유합니다.
선발된 학생들 6인 모두의 수필은 첨부파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재일동포로서 한국에서 산다는 것”
조00
‘재일동포로서 일본에서 사는 것’. 그것은 고민과 망설임의 연속이었다. 시작은 아마 조선학교를 다닌 것이었다. 철이 들었을 때 헤이트스피치 연설을 처음 들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 에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조선인은 분신자살하라.” “조선인을 일본에서 내쫓아라.” 거리에서 참담한 증오 표현이 난무했고 그 말들은 아직 어렸던 내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분명히 ‘우리’ 라는 존재를 자각했다. ㅡ '우리' 는 뭔가 다르다. ㅡ 그 차이는 분명 좋지 않은 것이고, '우리' 가 옳은 것, 좋은 것으로 배워온 것은 어쩌면 발설해서는 안 될 금기일 수도 있다, 여학생이 매일 아침 제2교복에서 저고리로 교복을 갈아입는 것도 초등학생이 집단 하교하는 것도 단순하고 무의미한 관례가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조선학교 교문은 단순한 학교 입구가 아니라 사회와 우리를 갈라놓는 큰 국경이라고 막연하게 이해했다.
중학생 때 고등학교 선배가 재판에서 원고로 서는 것을 보았다. 분노했다. 일본사회의 레이시즘과 차별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었다. 헤이트스피치를 눈앞에 뒀을 때 느꼈던 보이지 않는 ‘무언가’ 는 이데올로기의 차이, 정치의 충돌에서 오는 것이 였으며, 그런 사회의 부조화의 주름살이 거대한 파도를 대신해 우리 일상을 깊고 어두운 곳으로 가라앉히려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거대한 사회의 흐름보다 나는 법정에 선 선배를 보고 내뱉은 선생님의 말이 둔탁한 아픔으로 가슴에 박혔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ㅡ 조선인으로서 멋진 일이다. ㅡ 법정에 서는 학생, 교복인 저고리를 입고 시위를 활보하는 학생, 그런 광경이 일상이 되고 말았다. 학생, 교복이 재일동포들의 저항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당사자들에게 오히려 자부심을 고조시키고 긍정심을 높이는 촉매제가 되고 있었다. 물론 이 일은 슬픈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단지 나는 어딘가 공연히 허무 해졌다. 동포사회에서 쏟아지는 무상의 사랑, 너무나 소중하게 키워주는 조선학교라는 환경 옆에서 늘 역사가 남겨온 무시할 수 없는 과제들이 따라다녔고 저항의 발자국이 우리를 분발하고 자존심을 다지며 늘 우리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 우리는 재일동포이며 조선인이다. 일본인이 아니다. –
그러나 현대 일본인들에게 우리의 존재, 우리의 저항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왜 한국에 살아 본적이 없어?” “왜 통명을 안 쓰고 민족명을 아직 쓰는 거야?” “왜 일본국적으로 귀화 안 해? 너네 어차피 일본에서 계속 살거 잖아.” “조선학교는 차별받아 마땅하지 않아? 너 북한 지지하는 거야?” “재일동포는 도대체 몇 세까지 ‘재일동포’ 라고 말할 거야?” 무력감, 탈진감 … 지금까지 우리는 도대체 무엇에 항거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렇게 조용히, 안 보이는 데서 침묵해가는 걸까? 이러한 차별이 보이지 않는 일본 사회에서 왜 우리가 ‘우리’ 인지 설명하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조선학교와 재일동포라는 존재 자체가 그 경위 때문에 안고 있던 딜레마와 모순이 나의 미적지근한, 답답한 감정을 쌓이게 만들고 한편에 지금 상황이 분명 틀렸을 거라는 갈 데 없는 반항심만이 홀로 걷고 있었다. 그 상황 자체가 아직 어렸던 나에게는 너무 고민스럽고 무겁고 아팠다. 하지만 결국 이 갈 곳 없는 감정은 국가, 민족이라는 틀로 귀착되어 왔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낳는다. 그래서 나도 한국 국적임을 강하게 의식해 왔고 실지로 본적도 없는 자신의 뿌리를 나의 무의식속에서 상상하고 길러왔다. 왜냐하면 나는 조선서람이니까.
‘재일동포로서 한국에서 사는 것’. 그것은 지금 생각하면 기존의 ‘재일동포’ 라는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나’ 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지난 2월 외국이라고 하기엔 친근하고 내 나라라고 장담하기엔 아직 익숙하지 않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왔을 때 나는 완전히 외국인이었다. 행정적으로 말하면 주민번호라는 ‘증명서’ 가 없었던 것이고 일상생활에서 말하면 ‘우리’ 가 인지되지 않은 것이었다. ㅡ '우리' 는 한국 사회에서, 한국의 역사 속에서, 존재하지 않다. ㅡ 그것은 머리속에서 상상하는 것보다 매우 슬픈 일이었던 것 같다. 그만큼 나는 내 무의식 속에서 일본 사회를 살아가는 데, 저항하는 데 한국이라는 나라에 의지하고 기대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귀속의식 앞에 있던 '국가' 라는 찬란한 틀은 단순한 환상이었다. “왜 너는 녹색 여권을 가지고 있냐?” “왜 너는 부모님도 다 한국인이라 면서 한국어가 그렇게 서투러?” “왜 재일교포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거야?” “너는 왜 너가 한국사람이라고 말하니? 너의 무엇이 너를 한국인이다고 말시키니?” “결국 너는 어디 나라 사람이야…?” 유학생활을 시작해 매일같이 쏟아지는 질문들 앞에서 무엇을 어디서부터 설명하려 해도, 대답하려고 해도 말이 막혀 나오지 않았다. 일본인이라고 자칭하기에는 조선학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역사를 배워버렸다.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한국 사회와의 메울 수 없는 차이를 체감했다. 조선을 조국이라고 부르려면 지금 정권을 통째로 조국으로 생각해도 될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까지 재일동포로서 길러온 긍정심과 자존심, 일본 사회에서 홀로 걸어온 반항심 그리고 한국인, 조선인이라는 정체성들은 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완전히 갈 곳이 없게 되어 버렸다. 그만큼 나의 재일동포 자의식은 강하면서도 본질적으로 매우 여렸다. 이렇게 입국한지 두 달도 되지 않았을 때 나는 무너졌고, 한국 사회에 아주 쉽게 버려졌다. 결국 ‘우리’ 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였고, 속해 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외로움은 나와 나의 정체성을 더 한층 성장 시켰다. 지난 8월, 몽당연필 우리 또래에 참가하여 제주도 본적지를 찾아갔다.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의 대부분은 고향이 남쪽이고 나도 그중 한명이다. 그러나 이 ‘고향’ 은 1세에게 있어서의 것이며 2세 이후에는 그 고향의 기억, 냄새, 풍경을 이어가기 어려웠고 나 자신도 제주도를 고향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나의 정체성을 이역에서 유지하기 위한 서류상의 고향이 였다. 즉 본적지일 뿐이 였다. 제주도 동부, 바닷가 경치와 함께 당당히 자리잡은 두 집. 대문을 들어서면 훌륭한 기와집과 초가집이 우리를 영접했다. “이게 할아버지가 살던 집…?”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생전 말이 없던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이 섬, 이 집, 개념으로만 알던 본적지, 고향. 잠시 그 집을 둘러보고 있다가 한 남성이 거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세요?”
“아, 갑자기 죄송합니다. 저는 재일동포구요, 이 집이 본적지라는 이유로 찾아왔습니다.”
“아, 그래요. 아버지의 성함은?”
“XXX라고 합니다. 저는 그 딸이고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이 집에서 사셨다고 들어서요.”
“어, XXX형님? 나는 그 친척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도 몰랐던 친척하고 우연히 만난 감격스러움과 함께 내 몸에는 특이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가 이 땅에서 어떤 투쟁에 참여해 왔는지, 그 반면에 남겨진 친족들이 어떤 쓰라린 아픔을 안고 왔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독립, 남북의 대립과 분단, 그리고 그 와중 벌어진 제주도 4.3사건을 겪고, 나라의 분열과 함께 단절된 기억들과 헤어진 가족들을 상상하면 솔직히 내가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서도 되는 장소인지 갖가지 불안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쩌면 내가 일부러 이곳에 찾아온 것, 내가 조선학교를 다닌 것 그리고 내 존재자체가 한국에 남겨진 친족들이 지고 온 상상 못할 상처들과 고통들에 소금을 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도 모르게 겁이 났다.
하지만 삼촌이 처음 나에게 걸었던 말은 증조부모, 할아버지에 대한 비난도, 조총련, 조선학교에 대한 거절감도 아니었다. 다만 "이제까지 고생이 많았다, 잘 왔네."라며 다정한 눈빛으로 감싸줬다. 그리고 삼촌은 일본으로 몸을 피하게 된 가족들, 북한에 몸담았던 친척들, 그리고 한국에 남게 된 가족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해 주셨다. 그리고 그 역사를 일본에 있는 우리보다 더 가슴 아픈 역사로 기억하고 있었다. 삼촌에 그 간절한 눈빛과 말들에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입 밖에 내기에도 끔찍한 그 비극 속에서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조국을 떠났을까, 그 후 누구한테도 말 못했던 그 사건과 진실을 품으면서 어떻게 일본 사회에서 조용히 살았을까, 아버지나 나를 어떤 마음으로 조선학교에 보냈을까. 이제 와서는 들을 수 없는 할아버지의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 졌다.
ㅡ 우리는 한국의 역사선상에 분명히 존재한다. ㅡ 제주도에서 보낸 3일간이 내가 한국에서 겪은 경험들의 ‘의미’ 를 다시 한 번 보여준 것 같았다. 내가 일본에서 느낀 한반도에 대한 귀속 의식, 한국에 와서 느낀 외로움은 어느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며 느끼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만난 삼촌, 그리고 이 땅에 ‘그들’ 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 ‘우리’ 가 일본과 한반도 사이에서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조상들, 제주도 도민들,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한반도 사람들, 민족의 대립으로 갈라져 버린 사람과 사람의 연결고리의 아픔을 온몸으로 체감함으로 한국에서 느껴왔던 나의 외로움은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라’ 라는 틀속에서 정체성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우리’ 로서 그냥 재일동포인 것이다. 우리는 한국사회에 없지 않다. 다만 전후 80년이 지나려고 하는 지금 현재도 계속되는 이데올로기 대립, 갈수록 심화되는 민족 간 균열 사이에서 일본이라는 이국에 사는 조선사람으로서 조국이라는 개념과 ‘우리’ 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된다. 재일동포는 그 뿌리 때문에 특유의 복잡성과 딜레마를 안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그에 따른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 소중하게 이어져 온 민족교육의 바통을 어떻게 다음 세대로 이어가는지, 지금이 바로 그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재일동포로서 한국에서 사는 것, 그것은 지금까지 품어왔던 재일동포라는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나라’라는 틀 만이 아니라 내가 ‘나’로 서있기 위해서, 그리고 다음 세대로 연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가치관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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