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시리즈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56 요코하마 초급학교 음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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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기의 우리학교 vol.56 요코하마 초급학교 음악부
부원들과 연주하는 하모니
1972년, 김일성 주석 탄생 60주년을 축하해 처음 재일동포 학생 조국방문단으로 40일간 조선을 방문한 요코하마 조선초급학교 음악·무용부는 김주석이 참관한 공연과 두 차례에 걸친 회견, <8·18 교시>를 받은 일로 역사에 그 이름을 새겼다. 현재도 많은 아동이 소속된 이 학교 음악부에는 성악과 더불어 남학생은 중창, 여학생은 가야금 병창을 배운다.

<8.18>에 대거 발탁
조국방문 당시는 아직 이 학교에 정식 음악부가 없었으나 가야금 병창부가 있었고 또 66년에 가나가와 현 내 조선학교를 대상으로 열린 <꼬마 가무단 경연대회>에서는 높은 수준으로 공연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노래와 무용, 가야금 등 예술 활동에 정평이 나서 조국에서의 예술 공연에 대거 발탁되었다.
그 후 수년간은 대회 때마다 참가 아동을 선발하는 형태로 이어지다 78년에 음악전문 교원을 맞아들여 본격적으로 클럽활동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음악부의 전신이다.
요코하마 초급의 조국방문이 성사되기 3년 전에 이 학교를 졸업한 최옥희 씨는 88년에 이 학교에 부임했다. 이후 31년간 유치반 리트미크(리듬에 기초를 둔 음악교육법) 교실부터 초급부 음악수업, 음악부 지도 등 이 학교의 음악교육을 전면에서 이끌어 왔다. 부임 당시에도 여전히 <8·18 교시>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어서 4학년부터 시작하는 소조(클럽)활동임에도 음악부 희망자는 3학년부터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행진을 하며 무대에 오르는 모습이 예쁘고 귀여워서 ‘조국의 아이들 같다’며 동포들에게 사랑받았다고 한다.
부임 당시에는 일본 각지의 조선학교가 실력을 겨루는 중앙예술경연대회에 초급부문도 있어 합창, 중창, 2중창, 독창 등 각각 과제곡과 자유곡을 준비해야 했다. 대회마다 8, 9개의 작품을 준비해야 한다. 기존의 노래만으로는 부족해 창작을 하기로 했다. ‘예술은 여자가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시대다. 깊은 정서와 예술성이 풍부한 본국(조선)의 노래만으로는 에너지 넘치는 남자 아이들을 돋보이게 하기가 어려웠다. 최씨는 ‘재일조선인의 심경을 노래에 담지 않으면 이 아이들을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아이들의 일상과 정서를 담은 노래를 정력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음악부에서는 <고구려의 후예들> <아리랑 고추잠자리> 등 각지의 조선학교와 이벤트에서 부르게 된 많은 히트곡이 탄생했다.
통학길이 멀어도 조선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을 밝게 그린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는 몽당연필을 비롯한 한국에서도 부르게 되었고, 봄맞이 공연을 위한 아동·학생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했을 때는 조선의 아동들이 이 노래로 환영을 하게 되었다.
또 음악부는 91년부터 인근의 요코하마 시립 아오키(青木)소학교와 음악교류를 해왔다. ‘조선학교 뿐만 아니라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염두에 둔 최씨와 음악부 졸업생인 은일주 씨(가나가와 조선중고급학교 교원)가 함께 만든 <미래로 잇는 다리(未来への架け橋)>(2011년)는 교원들 간의 교류회나 서로의 학교행사에 갈 때 반드시 부른다. 가사 일부에 조선말이 들어간 이 노래를 아오키소학교 합창부는 물론 아직 클럽에 들어오지 않은 1, 2학년생도 듣고 외워서 전교생이 거의 부를 수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민족교육 초창기에 이국땅에서 아이들에게 민족예술의 씨앗을 뿌려준 선대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창작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졸업생 중에는 연주가나 가수, 애호가도 나왔습니다. 학생방문단으로 처음 조국을 찾아가 주석의 사랑의 직접 받은 전통 있는 요코하마 초급 음악부를 빛내 온 것을 진심으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최씨)
부원들과 함께 노래하고 싶어 ─
“한 명의 스타를 키워내기 보다 친구들과 함께 하면 하모니를 이뤄 집에서나 길에서나 늘 부르는 노랫소리 넘치는 학교를 만들고 싶었다.” 이러한 최씨의 철학에 유치반 때부터 익숙해진 이가 현재 오사카에서 사는 박소영 씨다.
“4학년 무렵에 보았던 선배들의 노랫소리와 모든 안무에 매료되어 4학년생은 나갈 수 없는 연주종목도 눈동냥으로 따라 부르곤 했다.”며 즐겁게 당시를 회상했다.
‘함께 노래하는 즐거움’에 매료되었지만 진학 예정이었던 가나가와 중·고 중급부에는 성악부가 없었다. 다른 형태로 음악과 함께 하겠다며 3년간을 민족관현악부에서 보내다 간신히 노래를 할 수 있는 음악부에 들어갈 수 있다고 기대했는데, 박씨의 고급부 진학과 동시에 고급부 성악부까지 없어지고 말았다. 어떤 클럽에도 소속되지 않고 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려고 했지만 클럽활동은 모두 소속된 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어떻게든 노래로 예술경연대회 무대에 서고 싶었던 박씨는 운동이 서툴렀음에도 불구하고 배구부에 들어가 독창으로 가을 예술경연대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음악선생님의 권유도 있어서 조선에서 3주간 무용과 악기 등 자신이 전공하는 예술분야를 배우는 <통신교육> 시험을 치고 멋지게 합격했다. 이례적으로 운동부 소속이면서 여름방학에는 조선에서 현지 지도자에게 노래를 배웠고, 일본에서는 녹음테이프를 들으며 혼자 연습하는 고급부 시절을 보냈다.
박씨는 조선대학교 교육학부 음악과에 진학했다. 연구원을 거쳐 교원이 되어 3년간, 그 후에도 비상근 강사가 되어 10년 이상 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조선가무단을 동경했으나 박씨가 고급부 시절에 가나가와 조선가무단이 없어지고 만다. 음악부 졸업생인 자신이 출신지역인 가나가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곳이 없어 고민하고 초조해하다 2011년 문화예술동맹 가나가와 음악부·민족앙상블 <뮤(MU)>를 결성한다. 멤버 중에는 음악부 졸업생이 많아 가나가와 현 내에서 열리는 다양한 동포 이벤트에서 활약했다.
“목표로 삼았던 곳이 잇달아 없어져서 꿈을 이루기에는 결코 운이 없었던 환경이었지만 요코하마 초급학교 음악부에서 즐거웠던 ‘성공체험’이 언제나 노래의 길로 나를 이끌었다. <뮤(MU)>에서의 활동을 통해 동료와 노래하는 행복을 새롭게 느꼈습니다.”(박씨)
모교로 돌아와 보답하다
김리혜 씨도 최씨에게 노래를 배운 한 사람이다. 올해는 출산휴가로 휴직을 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10년간, 은사인 최씨와 함께 모교 음악교육에 종사해 왔다.
김씨가 음악교원이 되려 한 계기도 음악부와의 만남이다. 음악부에서 가야금을 접한 이후 오늘까지 그 경험을 축적해 왔다. 고급부는 통신교육, 대학원 시절은 조선의 음악대학으로 유학을 가 본고장인 조선에서 가야금을 배웠다.
학교 창립 70주년을 맞이한 2016년. 김씨는 음악부 졸업생들을 모아 바자회와 학예회에서 현역 음악부와 컬래버 공연을 성공시켰다. 남성들은 <고구려의 후예들> 중창, 여성들은 가야금 병창을 연주해 ‘모두들 학생시절에 맡았던 부분은 완벽’했다고 한다. “여성 졸업생들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것은 음악부 졸업 후 처음이다. 그럼에도 학생시절에 연주했던 곡은 지금도 연주가 가능했습니다. 음악부에서의 경험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에 3년간의 경험이 얼마나 컸는지 다시금 실감했습니다.”(김씨)
전통 있는 이 학교의 음악부 지도는 부담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김씨는 “나와 박소영 씨처럼 졸업을 해도 조선의 음악을 즐기고, 음악부에서의 경험을 통해 동포사회와 인연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이 학교 음악부에 대한 보답이다.”라며 그 마음을 전했다.
(글, 사진 박명란)
* 월간 <이어> 11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