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시리즈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57 치쿠호(筑豊) 지역의 조선학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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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기의 우리학교 vol.57 치쿠호(筑豊) 지역의 조선학교(상)
“원한의 땅”에 세운 조선학교
일본 유수의 탄광지대 후쿠오카 현. 치쿠호(筑豊) 지역(노가타시(直方市), 이이즈카시(飯塚市), 타가와시(田川市, 카호군(嘉穂郡) 등)은 그 중심지로서 제2차 세계대전 때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연행·노동의 희생자가 되었다. 1945년에 조국해방을 맞이한 조선인들은 그 땅에 국어강습소를 세웠다. 치쿠호 지역에서의 민족교육의 시작이다.
탄광으로 강제연행
논픽션 작가인 故하야시 에이다이(林えいだい)씨의 저서 <「사진기록」 치쿠호·군함도―조선인 강제연행, 그 후>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0년에 걸쳐 ‘후쿠오카 현에는 250개 이상의 탄광이 있었고, 그 중심인 치쿠호 지방에는 15만 명의 조선인이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 인용부분은 타가와 경찰서의 満生重太郎 특고 주임과 이이즈카 경찰서의 柿山重春 특고 주임 두 명의 증언이다. 또 이 지역에 이입된 조선인의 수가 가장 많았던 곳은 아소광업소로 7,996명이었다. 안룡한 씨의 사진도 이 책에서 인용(참고-하야시 에이다이, <「사진기록」 치쿠호·군함도―조선인 강제연행, 그 후(筑豊·軍艦島-朝鮮人強制連行、その後)>
타가와(田川)에 사는 안계원 씨(70)의 아버지 故안룡한 씨도 16세 때에 ‘모집’이란 명목으로 강제 연행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오카현 타가와군 가와사키마치 이케지리에 있는 호슈탄광 우에다(上田)광업소에서 중노동에 종사했다.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 차라리 배라도 부른 채 죽고 싶은 심정으로 특공대에 지원했다고 해요. 가고시마까지 간 후 돌격하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해방을 맞았다고 들었습니다.”(안계원 씨)
타가와(田川) 조선초급학교 개교
해방 후 일본 전역의 상황이 그러했듯이 후쿠오카 현 각지에서도 국어강습소가 만들어졌다. 치쿠호 지역에서는 타가와, 쵸쿠안(直鞍) 지역 내 13개소에서 민족교육이 실시되었다. 한편 같은 시기에 고쿠라(小倉)에 만들어진 초등학원(소학교)에는 그 후로 후쿠오카 현에서는 유일하게 고급부가 병설(49년)되었다. 치쿠호 지역에서도 많은 동포가 이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학교폐쇄령’으로 현내 조선학교는 당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폐쇄·접수되었다.
전환기가 된 것은 1955년 5월 총련의 결성이다. 조선학교를 자주학교로서 주체적으로 운영해 나가기 위한 운동이 전개되어 56년에 오리오(折尾)에 규슈 조선중고급학교가 세워진다. 동시에 현내 각지에서도 조선학교 설립에 대한 요망과 기운이 높아져 치쿠호 지역에서는 59년 9월 1일에 타가와 조선초급학교(타가와 시, 이후 치쿠호 조선초중급학교)가 개교했다. 타가와 노동회관 건물을 빌려서 시작한 출발이었다.
안씨가 일본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소학교 3학년 어느 날, 아버지에게 “4학년부터 학교가 바뀔 거다.”라는 말만 듣고 다음 새 학기부터 타가와 조선초급학교 초급부 4학년으로 편입했다.
같은 시기에 동포들은 새 교사 건설에 착수해 1960년 8월 14일에 무사히 학교가 준공되었다.
“지금은 타가와 지부도 없어지고 말았지만, 예전에는 타가와에 분회(分會)도 있었으니까 동포들이 많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타가와에 학교를 세우고 싶어 했어요. ‘원한의 땅’ 치쿠호에 우리학교를 만든 겁니다.”(안씨)
십시일반, 자비를 털어 학교건설을 돕다
하지만 학교 하나를 만드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탄광노동자 출신의 동포가 많아 금전적인 면에서 어려움이 컸다.
“결코 여유가 있어서 학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 마음은 있어도 돈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만들고 싶은 심정에 뭐라도 하고 싶다는 동포가 많았다.”고 안씨는 말한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동포는 그만큼 경제적인 지원을 했지만 빠듯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동포들은 자신의 생활을 희생하거나 사전 어음을 발행하기도 해서 조금이라도 학교재정에 보탬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자금을 융통하기가 쉽지 않았죠. 항상 저녁이 되면 동포들이 학교에 모여 치열하게 토론을 벌였습니다. 학교를 위해 가난을 택한 것입니다.”라며 당시의 광경을 회상한다.
이런 상황이었음에도 치쿠호 지역에 있는 유일한 조선학교였기에 차츰 학구도 넓어지고 학생들의 수도 순조롭게 늘어갔다. 타가와 시내 이외에도 이이즈카(飯塚), 노카타(直方)에서도 아이들이 초급학교에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65년에는 각종학교법인 인가도 취득했다.
안씨는 타가와 초급학교를 졸업한 후 규슈 조선중고급학교로 진학. 편도 2시간 거리를 매일같이 다녔다. 졸업 후에는 조선대학교 문학부 외국어학과(당시)에서 공부한 후 1973년에 중급부가 병설되어 이이즈카 시로 이전한 치쿠호 조선초중급학교로 부임했다.
버스 통학의 추억
현재 재일본 조선 후쿠오카현 치쿠호지역 상공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정병리 씨(63)는 초급부 1학년부터 이 학교에 다녔다. 때마침 학구가 확장된 무렵이라 학교부터 주변지역을 도는 통학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씨는 카한잔(嘉飯山)지역 출신이다. 학교에서 버스로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다.
“아이들이 많이 사는 지역을 거쳐서 가니까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렸는지도 모르겠어요.”
또 통학버스를 생각하면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버스 운전수는 지역의 동포들이 교대로 해주었는데, 조은(朝銀, 동포 금융기관)의 직원이 귀가 버스를 운전하는 날은 도중에 직장에 들러서 자기 업무를 마무리한 후 남은 아이들을 데려다 주는 일도 있었어요.”라며 유쾌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밖에 인상에 남은 추억은 초급부 6학년 때 열린 후쿠오카 현내 조선초급학교들의 체육대회다. 여러 초급학교 가운데 타가와 초급학교가 2차례 우승을 했던 것이 기뻤다고 한다.
치쿠호 초·중급학교 새 교사 건설
정씨는 타가와 초급학교를 졸업한 후 규슈 중·고급학교로 진학했다. 중급부에 다닐 당시에는 타가와 초급학교 이전과 중급부 병설 문제, 그에 맞추어 새 교사를 준공해야 된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씨는 학교가 쉬는 일요일이 되면 새 교사 건설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자신의 아버지 故정경상 씨를 따라 이이즈카 시에 있는 학교건설 현장에 갔다.
“산이 그대로 그곳에 있는 상태였으니까. 이런 산이 정말 학교가 되는 것인가 생각했어요. 측량에 사용하는 도구를 들고 있기도 하고, 흙과 공사 때 나오는 쓰레기를 치우기도 하면서 동급생들과 함께 조금씩 일손을 도왔어요.”
외할아버지가 현장에 설치된 오두막에서 지내며 현장을 지키기도 했고, 토건업을 하는 동포들은 일하는 틈틈이 불도저를 끌고 와서 산을 깎아 내기도 하고… 그밖에도 많은 동포들이 날마다 하나로 똘똘 뭉쳐 새 교사 건설에 힘을 쏟는 모습을 목격했다.
준공식 날에는 많은 동포들이 학교에 모여 치쿠호 조선초중급학교로 다시 태어난 이 학교의 새 출발을 축하했다.
“당시 학생 수가 초·중급부를 합쳐 60명 정도였는데, ‘왜 굳이 새 학교를 세웠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앞으로 더 많이 학생들이 늘어날 것이고, 앞으로는 이곳이 치쿠호 동포사회의 중심지가 되어 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치쿠호 초중급학교가 준공됨으로써 학구가 변경되어 아동·학생 수는 예상대로 늘어났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예술단이 여러 번 방문하는 등 이 학교는 치쿠호 지역의 유일한 조선학교로서 존재감을 높여나갔다. (<하>로 이어짐)
* 월간 <이어> 2021년 1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