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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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기의 우리학교 vol.58 치쿠호(筑豊) 지역의 조선학교(하)

작성자 몽당연필
작성일 21-07-06 15:21 | 449 | 0

본문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58 치쿠호(筑豊) 지역의 조선학교()


치쿠호(筑豊조선학교를 기억의 거점으로

치쿠호 동포들의 열의로 1959년에 설립된 타가와(田川조선초급학교는 1973년에 이이즈카시(飯塚市)로 옮겨 치쿠호 조선초중급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당시의 교원학생들에게 새 교사 건설 당시 모습과 그 후의 학교생활에 대해 묻자 가슴 깊이 스며든 여러 추억들을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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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쿠안(直鞍) 지역에서 통학한 아동, 학생들이 통학버스 앞에서 찍은 사진(치쿠호 조선초중급학교 창립30주년 기념앨범)

 

간절히 염원했던 준공식

현재 북규슈 조선초급학교에서 교원을 하고 있는 정로미 씨(68)는 규슈조선중고급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대학교에 입학, 1973년에 사범교육학부 사범과를 1기생으로 졸업했다. 첫 부임지는 정씨가 졸업한 해에 후쿠오카현 이이즈카시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치쿠호 조선초중급학교(전신은 타가와 조선초급학교).

 

새 교사 준공식이 열린 것은 515. 준공식에는 총련의 한덕수 의장이 참석할 예정이어서 지역의 할머니, 어머니들이 통학버스를 함께 타고 대접할 음식마련을 위해 산으로 산나물을 캐러 갔다고 한다.

준공식 당일은 밤새도록 다 같이 춤추고 밥도 먹고. 치쿠호는 재일조선인에게 원한의 땅이니까 다른 지역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죠. 그때 동포들의 기뻐하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해요.”(정씨)

 

치쿠호 초중급학교가 준공되자 치쿠호 지역 여러 곳에서 아동과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한편으로 만수대예술단과 평양학생소년예술단, 조선예술영화 대표단, 국제무역대표단 등 다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단이 이 학교를 방문했다.

1980년대에는 <우리말을 잘 쓰는 모범학교><공부를 잘하는 모범학교> 같이 부문별 모범학교 호칭도 잇달아 받았다. 정씨도 아동, 학생들의 학력향상을 위해 공·사 구분 없이 공헌했다. “매번 중앙통일시험 기간에는 우리 집에 학생들을 불러서 매일 합숙을 했어요.” “비록 인원수는 적어도 다른 지역에 질 수는 없다-면학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으로 여하튼 치쿠호 학교는 다들 열심히 공부했어요.” 치쿠호 초중급학교는 같은 현에 있는 다른 조선학교와 비교하면 규모는 작지만 착실하게 그 존재감을 키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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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명의 편입생 소식을 전한 기사(1982년 4월 10일자, 조선신보)


16명의 편입생

치쿠호 초중급학교를 한층 더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 있다. 1982, 총련 후쿠오카현 치쿠조(築城)지부 츠이키(築城)분회가 있는 지역에서 일본학교에 다니던 16명의 아동, 학생들이 치쿠호 초중급학교로 편입하게 된 일이다. 전년도부터 1년간 계속해 왔던 <일요학교>의 성과였다.

츠이키(築城) 지역에는 대상연령의 아이들이 많이 있었어요. 하지만 후쿠오카현 북동부에 있는 치쿠조 군()에서 치쿠호 초중급학교까지는 고개를 하나 넘어서 와야 하기 때문에 자동차로도 1시간 이상 걸려요. 당시에는 좀처럼 통학하기가 어려워 교원들이 교대로 매주 일요일에 출장수업을 하게 됐어요.”

 

교원 2명 정도가 자동차를 타고 츠이키분회를 찾아갔다. 오전 중에 수업을 마치면 항상 동포의 집에서 점심을 대접받았다. 정씨는 당시 조선신보의 기사를 보여주면서 그 시절을 그리듯 이야기 했다.

<일요학교>가 열리는 어느 날, 아침부터 많은 눈이 내렸다. 이번 주는 취소하자는 의견도 나오는 가운데 이런 날이야 말로 반드시 가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차로 눈길을 달려 평소보다 1시간 반 이상이나 늦어져 현지에 도착하자 츠이키분회의 동포들조차 설마하는 표정으로 다들 놀랐다고 한다.

 

교원들의 열의에 감동했는지 이듬해 4월 입학식에는 16명의 편입생과 함께 츠이키분회의 동포들이 총출동해 입학식을 축하하러 달려왔다. 버스도 기증받아 아동, 학생들을 학교까지 데려가고 데려오면서 함께 이 학교에 다녔다.

정씨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추억을 꺼내놓으며 길었던 교원생활을 회상했다.

학교가 새로 세워지고 민족교육이 힘차게 발전해 나가서 정말 좋은 시기에 교단에 설 수 있었어요. 지금까지 도와주신 동포, 그리고 아이들그 마음을 생각하면 그만둘 수 없어서 지금까지도 교원을 하고 있어요.” 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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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쿠호 조선초중급학교(창립30주년 기념앨범)


절약을 위한 개인 침낭

북 규슈시에서 자란 이대미 씨(34)1992, 초급부 1학년부터 치쿠호 초중급학교에 다녔다. “출신학교를 물어오면 치쿠호라고 대답할 정도로 애착이 깃든 곳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녔던 시절에는 아동, 학생 수가 줄어서 동급생 인원이 한 자릿수였어요. 제각각 여러 지역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데 그 중에는 편도 2시간 이상 걸려서 다니는 아이도 있었죠. 아무런 걱정 없이 선생님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기억이 남아있어요.”(이씨)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어서 교사는 낡고 유리창이 깨진 곳도 있다. “학교 여기저기에 버섯이 나있기도 해요. 유치반 선생님의 책상 밑에서도 버섯이 자라요. 그 외에 박쥐가 날아 들어오지 않나, 빗물이 새질 않나, 하지만 그런 일이 싫지 않아서 지금도 좋은 추억이에요.” 라며 이씨가 웃는다.

 

치쿠호 초중급학교만의 문화도 있다. 초급부 4학년에 올라가 소년단에 들어가면 학생들은 반드시 1인당 한 개씩 개인 침낭을 구입한다고 한다. “중앙통일시험 기간이 되면 학교에서 합숙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그때 지참합니다. 거기서 침낭을 개는 방법을 연습하죠.”

나아가 재일본조선학생 예술경연대회 등에 참가하기 위해 숙박예정으로 이동할 때에도 치쿠호 학교 학생들은 침낭을 가져간다. “다른 학교는 숙소에서 이불을 주문하지만 치쿠호 학교는 절약하죠. 우리만 색색의 침낭을 가져가니까 창피하기도 했어요.” 이야기를 시작하자 줄줄이 이어지는 즐거운 에피소드들이 쏟아진다.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지는 장소가 되기를

치쿠호 초중급학교는 그 후 아동, 학생 수 감소로 운영난을 겪다가 2000년에는 중급부가 북 규슈 조선초중급학교로 통합되고 2006년에는 초급부도 마찬가지로 통합되었다. 이씨는 중급부 3학년부터 북 규슈 조선초중급학교로 전학했고 조선대학교 1학년 때 통합으로 인해 치쿠호 조선학교가 휴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대학교를 졸업하면 모교의 용무원(소사)이 되어 낡은 곳과 고장 난 비품을 고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진 이씨. “동포들이 모이는 장소, 돌아올 수 있는 장소가 없는 아쉬움을 치쿠호 학교가 없어진 것을 보고 처음 느꼈어요. 굉장히 서글프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죠.”

 

이씨는 그 후 이 지역의 조선학교에서 교원생활을 경험한 후 비전임으로 재일본조선청년동맹 치쿠호지부 위원장을 역임했다. 젊은 세대 동포들에게 호소해 일본 친구들과 장단서클을 시작하는 한편 지역의 총련지부, 여성동맹, 조선상공회, 청년상공회 등과 협력하면서 2016년에는 새로운 커뮤니티 치쿠호 리본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리본에는 Reborn(재생)Ribbon(리본=잇다)의 두 가지 의미를 담았다. 크리스마스모임과 만남 이벤트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활동하는 사람이 없으면 치쿠호 학교의 기억은 사라져 버려요. 1, 2세가 만들고 지켜주신 곳을 잃어버린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곳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커뮤니티를 느끼게 해주는 일. 동포들이 모이는 곳, 추억할 수 있는 곳을 작게나마 만들어 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 월간 <이어> 20212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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