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시리즈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59 영어교과서 편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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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기의 우리학교 vol.59 영어교과서 편찬의 역사
우리의 힘으로 만들자
‘조국통일과 번영에 공헌하는 유능한 인재로 자라날 학생들에게 국제적인 교류와 협조의 수단인 영어의 기초적 지식과 기능을 제공한다’
― 출판사 학우서방이 발행하는 교원용 참고서(2003년판)는 민족교육에 있어서 영어교육의 사명을 이와 같이 규정했다. 교과서는 해당 교과의 교육내용과 방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랫동안 조선학교 영어교육에 종사해 온 2명의 전문가 증언을 통해 영어교과서 편찬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고급부 영어교재편찬위원 멤버들. 뒷줄 우측에서 두 번째가 량남인 씨, 좌측에서 두 번째가 김경숙 씨(1976. 8.24)
1960년대 후반에 처음 독자적으로 만든 교과서
조선학교의 영어교과서 편찬에 있어 최대의 공로자를 꼽는다면 조선대학교 외국어학부 초대학부장(1974~1991), 조선대학교 도서관장 등을 역임한 량남인(梁南仁) 씨가 아닐까.
량남인 씨는 1953년에 도요(東洋)대학을 졸업한 후 추부(中部)조선중고등학교(아이치 조선중고급학교의 전신)에서 2년간 교단에 섰다. 그 후 교토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영국의 작가 헨리 필딩(Henry Fielding)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 1961년 조선대학교에 영어교원으로 부임했다.
당시는 외국어학부도, 전신인 문학부 외국어과도 없었던 시절. 교내에 영어교원은 량씨 혼자였다. 외국어 과목은 러시아어와 영어가 있었지만 러시아어를 선택하는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아 학교 내에서 영어에 대한 관심은 높지 않았다.
량씨가 아이치의 조선학교에서 근무할 당시에는 일본학교에서 사용하던 ‘Jack and Betty’라는 교재를 쓰고 있었다. 고급부에서는 학교마다 다른 교재를 선택해 수업을 진행했고 통일된 교과서는 없었다. 1950년대부터는 당시 소련의 교과서를 번역해 출판사 학우서방에서 인쇄해 사용했다. ‘내용적으로 그다지 좋은 교재는 아니었다’고 량씨는 말한다.
량남인 씨는 1965년 제1차 교과서 개편 때부터 영어교과서 편찬을 맡아왔다. 당시 총련의 중앙교육국장이 ‘우리에게도 독자적인 영어교과서가 필요’하다는 호소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한다. 처음 시도하는 독자적 교재편찬은 송도헌 씨(宋都憲, 이후에 학우서방 부사장)등 당시 도쿄중고급학교 교원 2명과 량씨까지 셋이서 시작했다. 그 결과 66년~68년에 걸쳐 중급부 1~3학년 영어교과서가, 69년에는 고급부 영어교과서가 발간되었다.
1960년대, 70년대는 학우서방에 영어교재 편찬 전문가가 없어서 량씨는 거의 학우서방의 사원처럼 일을 했다고 한다. 교과서를 편찬하는 동안에는 낮엔 대학에서 업무를 보고 저녁부터는 학우서방으로 출근해 그곳에서 숙식하며 일을 했고 다음 날 대학으로 출근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4가지 기능을 중시한 새로운 흐름
량남인씨보다 10년 정도 늦은 1970년대부터 영어교과서 편찬에 종사한 이는 이전에 학우서방에서 근무한 김경숙(金慶淑) 씨다.
일본의 고교를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거쳐 66년부터 78년까지 도쿄중고급학교에서 영어교원을 역임한 김경숙 씨. “1960년대는 외국어라 하면 러시아어가 우선이었던 시대입니다. 영어는 적국의 언어라 해서 학생들의 동기부여 또한 낮았어요. 영어교원으로서 입지가 좁다는 생각도 했어요.”
김씨는 도쿄 중고교 교원시절이었던 1976년~77년의 교과서 개편사업에 소집되었다. 당시의 영어교육은 문법과 번역을 중시했다. 김씨는 “영어교육이 이 상태로 괜찮은가 의문을 가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영어교육 발전을 위해서 스스로 영어를 좀 더 공부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1978년부터 80년까지 영국으로 유학. 그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동시에 교재의 중요성도 통감했다고 한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씨는 영어교재를 만드는 일에 종사해야겠다고 다짐하고 1981년, 학우서방에 들어갔다.
“1970년대 무렵도 영어교과서 문장은 문어체여서 딱딱했고 내용도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학생들의 심리적 특성에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고 김씨는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학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시는 일본학교에서도 외국어교육은 오래된 교재를 사용했고 문법, 번역을 중시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1980년대에 들어서 영어교육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읽기, 듣기, 쓰기, 말하기 등 4가지 기능을 중시하게 되었다. 조선학교의 영어교육 현장에서도 민족적 주체성 확립이라는 큰 원칙을 지키면서 새로운 교과서 만들기로 방향이 잡혀갔다.
1981~82년에 걸쳐 교과서의 전면개편이 실시되었고 83~84년에는 중·고교용 새로운 교과서가 출판되었다. 1970년대까지의 영어교육이 영어지식을 가르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면 90년대 이후는 영어를 실제로 잘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교재 측면에서 보면 이전까지는 ‘교과서를 가르친다’에서 ‘교과서로 가르친다’로 바뀌었다. 김씨는 80년대 교과서 개편의 의의를 위와 같이 정리했다.
학생들을 적극적인 영어발신자로 키우기 위해 회화문이나 구어적 표현을 많이 넣고 삽화나 사진도 늘렸다. 일본의 학습지도요령도 참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교과서를 만들게 된 것도 이 시기 부터이다.

1980년대에 전면 개편된 중고급부 영어교과서
‘이것이 나의 사명’
영어교과서 편찬위원회는 김경숙 씨와 량남인 씨 두 사람이 중심이 되었고 그 외에도 조선대학교와 중·고급학교의 교원이 소집되었다. 80년대를 예로 들면 외국어학부에서는 신성방 씨, 오상원 씨(두 분 모두 고인) 등 쟁쟁한 분들이 모였다. 교과서 개편의 방향이 잡히자 교재의 주제와 구체적인 내용을 결정하며 각각의 멤버들에게 업무가 분담되었다. 여름방학에는 2~3주간 합숙도 했다. 피서지의 합숙시설도 이용했지만 나가노(長野)조선초급학교도 자주 이용했다고 한다.
김경숙 씨 또한 네이티브 스피커의 감수를 받거나 교과서에 게재할 사진을 입수하기 위해 주일대사관을 찾아가는 등 전문가로서 교과서 개편사업에 힘을 쏟았다. “고생은 많았지만 보람도 컸어요. 그렇게 훈련된 선생님들이 주축이 되어 조선학교 영어교육을 발전시켜 나갔어요.”
영어교과서는 1965년 이후로 대략 10년 단위로 개편되었다. 80년대에 실시된 교과서개편 이후, 기능교육 측면이 강조되었는데 조선학교에서의 영어교육은 영어회화학교와 학원 등에서 가르치는 것과 결코 같지 않다고 량씨는 강조한다. “영어교과서 개편은 한 개 교과에 그치는 활동이 아닙니다. 외국어교육이 무너지면 민족교육 전반이 무너진다는 절박함과 책임감을 갖고 노력했습니다.”
량남인 씨가 교과서 편찬에 몸담았던 기간은 40년이 넘는다. “미래에는 학자가 되어 문화사 연구를 하려 했습니다만, 조선대학교에 들어와서 ‘우리들의 힘으로 교과서를 만들자’는 말을 듣고 이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느꼈습니다.”
한편 김경숙 씨도 80년대, 90년대, 2000년대의 교과서 편찬에 참여했다. 교재작성자는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는 것만이 업무가 아니다. 항상 현장에 나가 실정을 파악해야만 한다. 두 분 모두 전국의 교육현장을 돌아다녔던 경험을 이야기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김경숙 씨는 교육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현장의 젊은 선생님들을 지원하며 앞으로도 영어교육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 월간 <이어> 2021년 4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