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시리즈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60 시가(滋賀)조선초급학교(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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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기의 우리학교 vol.60 시가(滋賀)조선초급학교(속편)
‘우리들의 학교라고요!’
시가(滋賀)조선초급학교가 2020년 4월 24일에 창립 60주년을 맞아 올해 4월 25일에 기념식을 연다. 개교 당시는 오우미하치반시(近江八番市)의 공민관을 빌려 학교를 운영했는데, 1962년에 오츠시(大津市)에 동포들의 자비로 교사를 건설, 당시를 잘 아는 이 학교 2기생의 이야기와 사진에서 초창기 학교의 숨결을 전하려 한다.
오우미하치반시(近江八幡市)의 공민관에서 출발한 시가 조선중급학교
시가현 내 공립소·중학교에 18개의 조선학급
1945년 8월 조국해방 후 시가현에는 약 2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현 내에는 우후죽순처럼 조선학교가 생겨나 48년 7월에는 19개교에 1,039명의 아동이 다닐 만큼 발전했다.(※ 나중에 11개교로 정리)
그러나 간신히 만든 교육의 장은 일본정부와 GHQ(점령군)에 의해 조선인학교 폐쇄령(48년, 49년)이 내려 폭력적으로 빼앗기고 만다. 시가현 내 조선학교 11개교가 폐쇄되고 아이들은 일본학교로 쫓겨 갔다.
하지만 시가현 동포와 아이들은 민족교육을 포기하지 않고 지자체에 요청, 서명, 동맹휴학 등 끊임없이 투쟁해 일본의 공립학교에 조선학급을 설치하게 만든다. 민족교육의 등불을 줄곧 꺼뜨리지 않았다. 시가현의 조선학급은 18곳으로 확대 ▶조선어 이외에도 다양한 교과를 가르쳤음 ▶전용 교실이 있었음 ▶코호쿠(湖北), 코토우(湖東, 湖南), 코사이(湖西) 등 각 지역 단위로 조선학급이 모여 ‘학교’를 구성―하는 등 전국 조선학교의 모델이 되고 있었다.
오우미하치반시(近江八番市) 공민관에서 출발
시가현의 조선학급은 소중히 운영되었지만 중학교로 이어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민족학급은 소학교가 대부분이고 중학교는 마이바라(米原)에 1개뿐이었다. 50년대 후반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중등교육에 대한 요구가 높아져 가는 가운데 시가현에서는 조선중학교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 학교의 교육회 회장을 역임한 고 이규대 씨의 말이다.
“오우미하치반에 사용하지 않는 공민관이 있어서 시장과 교섭을 한 결과 1년간 쓰는 조건으로 빌리게 되었어요. 그렇게 시가현에서 유일한 민족학교인 시가조선초중급학교의 전신이 되는 시가조선중급학교가 1960년 4월 24일에 출발합니다. 공민관은 교실 두 개 정도의 크기에 베니아판으로 교실 4개와 교직원실을 만들었습니다. 학생들은 90명 정도인데 귀국을 전제로 모두들 일본학교를 그만두고 통학했지요….”
시가중급학교에는 현내 각지에서 학생이 모여들었다. 2기생인 이상우(李庠雨 74)씨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히코네(彦根)시립 죠토(城東)소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운영하는 대중식당이 히코네역 근처 상점가에 있었어요. 제가 살았던 동네에 동포는 적었고 시타가와라야키초(下瓦焼町)에는 조선인부락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코호쿠(湖北)지부 사무소가 한때 퇴거하게 되어 우리 가게 대각선 앞에 있는 집을 빌려 사무소로 썼습니다. 그 사무소에 드나들면서 민족학급 선생님이 조선말을 가르쳐주었고 동포 친구들과도 친해졌어요. 청년학교 활동에 평생을 바친 누나의 영향과 무엇보다 조선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서 조선학교에 다니기로 했습니다.”
재일조선인의 중등교육은 48년 전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는데 60년 4월까지 시가현에 중급부는 없었기 때문에 오츠시(大津市)에 사는 아이들은 교토 중고급학교로 가고 마이바라(米原)에 가까운 집은 아이치 중고교로 진학했다. 이상우 씨의 말이다. “나도 아이치 중고교로 가기 위해 입학시험을 치고 60년 4월 1일에 입학식에도 참가하고 8일부터 기숙사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오우미하치반에 중급부가 새로 생긴다, 새로운 중학교로 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 죠토소학교의 조선학급 교원을 하고 있던 심재태(沈載態선) 선생님이 데려가 주었습니다.”
중학생들, 여름방학에도 땀 흘리며 학교건설에 나서다
이렇게 이상우 씨는 개교한 시가중급에서 40명의 동급생과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건물에서의 학교생활은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시가현의 동포들은 자비로 학교를 세우기 위해 나섰다.
학교는 동포가 많이 사는 오츠시(大津市)에 세우기로 하고 화재로 불에 탄 방적공장 부지를 사들였다. 교사를 신축하면 비용이 들기 때문에 요카이치시(八日市)의 구 육군 제3비행장연대의 사령부를 저렴하게 불하받았다. 자재운반은 다카시마시(高島市) 신아사히(新旭)에 있는 동포업자가 맡았다고 한다.
교사건축은 전부 동포들의 힘으로 해냈다. “토지가 공장 부지였기 때문에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어서 다 함께 그걸 깨고 바닥을 다졌습니다. …기와 한 장, 판자 한 장까지 소중히 다루고 옮긴 것도 동포의 트럭입니다. 조립만은 전문 업자에게 맡겼는데 거의 자력으로 건설한 셈입니다.”(이규대 씨의 증언)
이규대 씨가 ‘특히 열심히 일했던 것이 오우미하치반의 중학생들’이라고 한 것처럼 학교건설에는 이상우 씨를 비롯한 중학생들이 시가현 본부(재일본조선인총연랍회)의 강당과 2층에서 합숙하면서 ‘우리의 학교를 세운다’며 어른들 이상으로 애를 썼다고 한다.
이상우 씨가 ‘내 인생의 원점’이라 말한 학교건설이다. “중학교 3학년 때 2학기부터 오츠(大津)에 세운 새 학교로 가게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름방학 전에 담임인 이동(李東)선생님이 학교건설에 협력해달라는 제안을 했고, 학생회에 요청했습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며칠 후 합숙준비를 마친 우리들은 제제역(膳所駅)에 모였고 키노시타마치(木下町)로 향했습니다. 케이한선(京阪線) 니시키(錦)역을 지나 학교로 향하는 좌측의 좁은 길에 도착한 순간 건설 중인 교사를 보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달려갔습니다. ‘여기가 우리들의 학교인가, 우리학교야! 우리의 학교라고!’ 조선말과 일본말이 섞인 외침이었지만 함께 기뻐했습니다.”
시가 조선중급학교 취주악부(1961년)와 학교건설을 돕는 중학생들(1962년)
운동장이 될 장소에는 요카이치시(八日市)에서 가져온 목재가 수북이 쌓여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목재를 옮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기초부분과 기둥,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그대로 살려서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맞이한 1962년 12월 16일의 낙성식에는 800여 명의 동포들이 참가해 기쁨에 휩싸였다고 한다. 63년에 초급부도 병설되었다.(중급부는 2003년에 휴교)
직접 만든 학교에 대한 애착은 깊었고 그렇게 이상우 씨는 시가 조선학교에서 청춘을 보냈다. 취주악부에 들어가 알토 색소폰을 담당했다. “하나 같이 부족한 시절에 취주악 악기가 어떻게 있었는지 모르겠어요(웃음). 당시 취주악부는 조선학교의 상징이었다. <김일성장군의 노래> 레코드를 하루에 몇 번이나 들으며 연습했습니다. 니가타로 향하는 호쿠리쿠선(北陸本線)의 기점인 마이바라(米原)역과 한국의 민주화를 요구한 제제(膳所)공원에서의 집회, 데모행진에서 자주 연주했습니다. 조선학교에서는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는 해방감이 있었고 사회실천 활동을 통해 조선인으로 각성되어 갔습니다.”
이상우 씨는 시가초중급학교를 졸업한 후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사범과를 거쳐 66년에 모교에 부임했다. 84년부터 87년까지 교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의 길을 걸어왔다.
자주학교로 시작해 학교폐쇄의 시련을 이겨내고 조선학급, 그리고 자비로 세운 교사를 가진 조선학교로―.
창립 60주년 기념지에 실린 이씨의 글에는 인생을 크게 바꾼 모교에 대한 마음이 뜨겁게 담겨 있었다.
* 월간 <이어> 2021년 5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