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시리즈

우리학교 시리즈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63 과외활동 편 / 도쿄 중고급학교 <학교신문>

작성자 몽당연필
작성일 22-07-18 15:42 | 203 | 0

본문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63 과외활동 편 / 도쿄 중고급학교 <학교신문>

 

쉼 없이 내달렸던 청춘시대의 증거

학교창립 75주년을 맞는 올해(2021) 가을에 개관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 중인 도쿄 조선중고급학교의 연혁실에 당시 이 학교 재학생이 1960년대 중반에 발행된 <학교신문>을 기증했다. 반세기를 거쳐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지면에서 격동의 시대에 청춘을 보낸 조고 학생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d43ac138550fc16bf7c978ad187cc35d_1658126058_4846.jpg
- 위쪽이 <학교신문> 10호, 아래쪽이 <학교신문> 9호 -

조고위원회 직속 클럽

신문의 기증자는 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 고문 강혜진 씨(도쿄조고 16). 19644, 오사카 조선고급학교에서 도쿄 조선중고급학교 고급부 2학년으로 편입해 온 강 씨는 교내 학생 조직인 재일본조선청년동맹(조청) 도쿄조고위원회의 선전부 임원으로 도쿄조고 신문부에서 <학교신문> 편집, 발행을 맡았다.

선전부의 주요 활동에는 벽보라 부른 대자보 같은 게시판 제작이 있다. 강 씨도 그 일을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신문제작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 신문부는 축구부나 무용부 등 다른 일반적인 운동·예술 클럽과는 달리 조고위원회의 직속이라는 위치였다. 실질적으로 <학교신문>의 내용을 보면 조청조고위원회의 기관지 같은 역할을 도맡고 있다. 그밖에도 조고위원회 직속 클럽으로서는 방송부와 사진부 등이 있었다.

 

여기서 역사를 조금 살펴보자. 도쿄중고에서 학교신문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대자보 <백두산>이다. 학교가 창설되었을 당시 교내에는 현재의 조청과 같은 학생들의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다. 창립 3년 후인 1948, 학생자치회가 결성된다. <백두산>은 이 학생자치회의 기관지 같은 역할을 맡았다. “당시, 학교의 명물이었던 학생자치회의 활동, 스포츠와 예술분야에서의 성과, 조국의 정세, 재일조선인운동 등의 기사도 게재했다. 아침에 등교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먼저 <백두산>을 들여다보고 교실로 향했다. 화제가 되었던 내용에는 학생들이 몰려들어 기사를 읽기도 했다.”

(도쿄중고급학교 공식사이트 연혁사 http://www.t-korean.ed.jp/history.html)

<백두산> 게시판은 조청조고위원회의 게시판으로 이번 호의 무대가 되는 60년대 중반에도 있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지면

<학교신문>에는 어떤 기사가 실렸을까. 강 씨가 모교에 기증한 <학교신문> 9(65610일자)와 제10(같은 해 1110)의 지면을 살펴보자.

91면에는 총련결성 10주년 축하기사를 게재했다. 이어지는 2면에는 우리말 상용운동이나 조국의 서적 읽기 운동 등 총련결성 10주년을 맞는 당시 교내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기사가 실려 있다.

4면과 5면은 펼침 면으로 구성되었는데, 총련결성 10주년에 맞춰 열린 집단체조(매스게임) ‘조국에 바치는 노래특집이 강한 임팩트를 준다. 여기 출연한 여학생의 수기가 당일의 감동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8면의 문예란에는 조국의 대학생이 보내온 편지와 조고학생들이 쓴 독서 감상문 등이 눈길을 끈다.

그밖에도 당시 축구부 활약을 소개한 기사나 일본 고교에서 전학 온 학생의 수기 등 폭넓은 이야기들이 지면을 구성하고 있다. 학생이 편집하는 신문임에도 모범교원 집단운동등 교원에 관한 토픽까지 팔로우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강 씨의 말에 의하면 당시 신문부 부원은 5~6명이었다고 한다. 신문제작 작업실은 오로지 신문부실이었다. ‘학생 신분이면서 학교에서 취침하며 작업을 했다고 한다. 당시는 등사판 인쇄가 주류다. 지금처럼 컴퓨터나 DTP 같은 편집기재도 없이 모두 수작업이었다. 그러다가 등사판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좀 더 본격적인 신문을 만들고 싶어 당시 신주쿠(新宿) 쓰쿠도하치만초(筑土八幡町)에 있던 조선신보사의 인쇄설비를 빌려 인쇄했다고 한다. 이번 호에 다룬 제9, 10호는 모두 조선신보사에서 인쇄된 것이다. “신문제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원고와 사진을 갖고 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해서.” 강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멋쩍게 웃었다.

기사 발굴은 어떻게 했을까. 조고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교내의 다양한 정보가 들어왔다. 재미있을 것 같은 테마가 있으면 당사자에게 원고 집필을 의뢰하거나 신문부에서 직접 취재했다. “문장 집필 능력도 지금의 고교생만큼 좋지 않았다. 당시의 기사를 다시 읽어보면 창피한 것도 아주 많다.”고 강 씨는 말했지만 제10호의 1면에 게재된 주장 <민주주의 민족교육의 신성한 권리를 철저하게 옹호하자>는 고교생이 썼다고는 생각지 못할 강경한 문장이다.

 d43ac138550fc16bf7c978ad187cc35d_1658126255_8586.jpg
- 신문부실과 부원. 뒤쪽 학생이 당시 고급부 3학년 강혜진 씨 / 기사 집필 중인 강혜진 씨(본인 제공) - 
- 총련결성 10주년을 기념해 열린 매스게임 ' 조국에 바치는 노래'(65년 5월 28일, 코마자와 경기장, 도쿄중고 사진 제공) -

d43ac138550fc16bf7c978ad187cc35d_1658126256_0378.jpg

- 1948년 당시 <백두산> 게시판과 학생자치회 멤버들 - 


조국에 바치는 노래

총련의 결성, 조국 조선에서 보내온 교육원조비, 귀국운동, 조선대학교 창립 등 1950년대 중반 이후의 굵직한 사건들을 거쳐 60년대에 들어서면 조선학교에 다니는 아동·학생들이 극적으로 증가해 민족교육은 일대 번성기를 맞는다.

19654월에 입학한 고급부 18기생은 808명이다. 고급부 역사상 가장 입학생 수가 많았던 때가 이 해다. 67년에는 고급부 학생 수가 2,000명을 넘었다. 한일조약 반대운동, 외국인학교법안 등 60년대 중반 이후로 한 층 더한 격동의 시대가 펼쳐진다.

강 씨에게 <학교신문> 편집 과정에서 인상에 남은 지면에 관해 묻자 매스게임 조국에 바치는 노래라는 답이 돌아왔다. 5층의 새 교사가 준공된 65528, 총련결성 10주년을 축하하는 매스게임 조국에 바치는 노래가 코마자와(駒沢)경기장에서 거행되었다. 조선대학교, 도쿄 중고급학교를 비롯한 간토지방의 조선학교 학생들 8,000명이 참가한 큰 행사다. 여기 출연했던 이들에게는 반세기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강열했던 추억으로서 그날이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학교신문의 지면을 통해서도 당시의 열기가 전해진다.

강 씨는 도쿄조고를 졸업한 후 조선신보사에 입사했다. 2년 후에는 조선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다시 조선신보사에서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시작한다. 조고시절의 학생신문은 버리지 않고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학생신문은 조고에서 보낸 청춘시절 그 자체다. 그 격동의 시대를 내달려왔던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도쿄 중고급학교에서는 지금까지 <학교신문> 이외에도 각 시대별로 다양한 발행처에서 여러 신문을 발행해 왔다. 강혜진 씨가 보관하고 있는 <학교신문>은 제9호와 제10호 뿐이다. <학교신문> 발행이 언제부터 시작되어 언제까지 이어졌는지 현재로서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 월간 <이어> 2021년 10월호에서



법률상담 문의하기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