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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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기의 우리학교 vol.64 중등교육의 시작(가나가와 현)

작성자 몽당연필
작성일 22-07-19 15:22 | 152 | 0

본문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64 중등교육의 시작(가나가와 현)

 

1945815, 조국 해방 후 가나가와 현에는 요코하마(横浜), 나가쓰다(長津田), 신코(神港), 이소고(磯子), 야마토(大和), 가와사키(川崎), 즈시(逗子), 가마쿠라(鎌倉), 쓰루미(鶴見) 등 각지에 국어강습소가 개설되었다. 그 후 중등교육에 대한 요망이 높아져 195145일에 <가나가와 조선중학교>가 창립된다. 초창기의 중등교육을 받은 동포의 증언과 연혁자료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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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학교생활 모습(가나가와 중고교 제공) -

산림을 구입해 학교를 건설

19451015일에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결성된다. 가나가와 현에서의 민족교육은 같은 가나가와 현 본부가 결성된 후 조직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당시의 조련 가나가와 현 본부위원장은 고 한덕수 의장이다.

요코하마 시내에서는 곳곳에 있었던 국어강습소를 통합해 조련 요코하마지부 사무소 2층에 <요코하마 조련초등학원>(462)을 설립한다. 이를 계기로 초등교육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아동 수의 증가에 따라 새로운 교사 건설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1948년에 <조련 요코하마 중앙소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예정부지는 현재의 요코하마 조선초급학교와 가나가와 조선중급학교가 있는 가나가와구 사완도(沢渡)였다. 이때까지 멸시를 받아왔던 동포 아이들이 가슴 펴고 당당히 공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높은 지대에 있는 최적의 장소에 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일본의 패전이라는 복잡한 국내정세와 경제적 불안정 때문에 학교건설은 심한 곤란을 겪는다. 토지 구입뿐만 아니라 건축자재를 조달하는데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목재는 배급제였다. 필요한 양을 입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조련 가나가와 현 본부가 아키타 현에 있는 산림을 구입해 그곳에서 목재를 조달했다고 한다. 또 열심인 동포들이 물심양면으로 학교 건설사업을 도왔다.

가나가와 조선중고급학교 제3기 졸업생인 손용순 씨(81)동포들의 기부가 없었더라면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자기 집이 파친코를 운영하는 한 동급생이 예전에 그렇게 많은 돈을 기부할 거면 가족들을 위해 얼마쯤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한탄하던 얘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민족성을 몸으로 실현시키는데 있어서 동포들이 가장 많이 협력할 수 있는 곳이 학교였지 않았을까.”(손 씨)

조금씩 완공되어 간 건물이 태풍의 영향으로 하룻밤 사이에 무너지는 사건도 있었지만, 1949년에 무사히 준공되었다. 하지만 그 직후인 10월에는 조선학교 폐쇄령으로 토지와 학교건물이 몰수당한다. 요코하마를 비롯한 현내 조선학교는 일본 공립학교의 분교가 되었지만, 동포들의 격렬한 저항과 운동을 펼친 결과 가나가와 조선학원 명의로 토지를 불하받아 되찾게 되었다. 민족교육의 발전에 있어서 차기 과제는 중등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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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 고급부 제2기 학생들의 수업풍경(가나가와 중고교 제공) -



교과서가 부족해서

195145<가나가와 조선중학교>, 초기에는 조련 요코하마중앙소학교의 교실을 빌려서 시작되었는데 이듬해인 529월에는 목조 2층 건물에 6개 교실로 이루어진 중급부 교사가 신축되었다. 앞서 나온 손 씨는 1953년에 이 학교에 입학했다. 손 씨는 가와사키에 살고 있었기에 1기생인 언니와 함께 전차를 타고 다녔다. “먼 지역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왔습니다.”

동급생은 200명 정도 되었나. 처음엔 교과서가 부족해서 1학기 동안은 매일 동무의 교과서를 빌려서 수업을 받았어요. 출석부가 ㄱㄴㄷㄹ순이어서 씨인 나는 순서가 뒤쪽이었지요. 그래서 교과서를 받을 수 없었어요.”라며 웃는다.

또한 교원들이 인상에 남아 있다고 한다. “화학은 게이오대학, 영어와 일본어는 도쿄대학, 국어는 도호쿠대학이처럼 일본의 유명한 대학에서 공부한 동포들이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손 씨가 특히 열심히 한 것은 미술수업이다. ‘난부(南武)조선인소학교에 다닐 때에 그림을 그려보라는 권유를 받았는데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아졌다고 한다. 중급부에 다닐 무렵에는 무사시노(武蔵野)미술대학에 다녔던 한국 출신의 동포에게 석고 데생을 비롯해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웠다.

즐거웠던 학교생활의 추억은 무궁무진하다. “학교 부지 아래 커다란 마당이 있어서 다 같이 도시락을 들고 그곳에 가서 함께 먹기도 했죠. 또 옛날에는 지금처럼 건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에서 항구가 다 보였어요. 저녁노을이 아름다워서 모두들 넋을 놓고 바라보다 줄줄이 집으로 돌아갔던 일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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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요코하마 조선초급학교와 가나가와 조선중고급학교의 전경(가나가와 중고교 제공) -
 

민족교육의 발전을 위해 일치단결

가나가와 조선중학교는 19543, 첫 번째 졸업생(74)을 배출함과 동시에 중급부를 졸업한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4월에 고급부를 신설했다. 학교명도 현재의 <가나가와 조선중급학교>로 개칭했다.

그 후 1959년부터 실시된 귀국사업을 전후로 민족교육에 대한 동포들의 열기가 뜨거워진다. 입학 희망자는 계속해서 증가해 1950~60년대에 걸쳐 가나가와 조선중급학교의 학생 수는 1,300명에 이른다. 이 급속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동포들은 1961년에 4층짜리 철근 건물로 된 새 교사를 완공한다. 1965년에 각종학교 인가를 취득하고 이후에도 단계적으로 교사의 증개축을 거듭했다.

1968년부터는 지상 5, 지하 2층에 이르는 철근건물의 교사를 만들기에 나섰다. 19705월에 거행된 낙성식에는 5,000명의 동포들이 달려와 현 전체의 동포가 나서 이뤄낸 공로를 성대히 축하했다. 이것이 현재의 가나가와 조선중고급학교다.

손 씨는 가나가와 조선중고급학교를 졸업한 후 임시 교원양성소에서 반년 간 공부하고 가와사키 조선초급학교와 난부 조선초급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자 가나가와 조선중고급학교로 자녀를 보냈다. 현재는 손자가 이 학교 고급부에 다닌다.

민족교육을 받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무엇을 보더라도 나의 정체성으로 모든 일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정체성이 없다는 것은 외로운 일입니다. 제 아들도 이 씨 성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본의 친구들도 많이 있는데 결코 부끄럼 없는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런 나 자신이 좋습니다.”(손 씨)


* 월간 <이어> 2021년 12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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