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시리즈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67 <교원>편_일본인 미술교사 아오야마 다케미(青山武美)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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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기의 우리학교 vol.67 <교원> 편_일본인 미술교사 아오야마 다케미(青山武美) 씨
글. 백린(재일조선인 미술사연구원)
조선학교의 일본인 미술교사
전쟁과 식민지에 대한 속죄의 마음을 가슴에 담고 조선인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조선학교의 교단에 섰던 미술교원 ‘아오야마 선생’. 재일조선인 미술사를 연구하던 중 알게 된 일본인 교사 ‘아오야마 선생’에 대해 자료와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다.

- 뒷줄 중앙에 안경을 쓴 남성이 아오야마 다케미 시(고베 조선고급학교 1962년도 졸업앨범, 사진 제공은 이 학교 미술교원 박일남 씨) -
미술의 즐거움을 가르쳐주었다
조선학교에서 약 20년간 미술교원으로 활약했던 일본인이 있다. 바로 아오야마 다케미 선생이다.(남성, 1908~1980) 내가 아오야마 선생(인터뷰로 만난 분들 대부분이 아오야마 다케미 씨를 ‘아오야마 선생’이라 불렀기에 이 글에서도 그렇게 쓰기로 한다)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교토에 있는 재일조선인 미술가 하상철(河相喆) 씨(1937, 교토 조선중고급학교 1기생)에 대해 조사할 때였다.
하 씨의 작품이 조선대학교 교육학부 미술과에 기증된 일을 계기로(이 당시의 작품들은 필자가 대표로 일하고 있는 일반사단법인 재일코리안 미술작품 보존협회(ZAHPA)로 나중에 소장 장소를 옮김) 하 씨에 대해 알아보게 되었다. 상세한 경력은 후술하겠지만 하 씨는 중학생 시절 아오야마 선생에게 미술을 배웠다고 한다. ‘조선학교에 있는 일본인 선생입니까?’라고 물은 내 질문에 하 씨는 ‘그래요, 일본인 선생’이라며 ‘야오야마’라는 그의 성만 기억했다.
일본인이 조선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게다가 필자의 연구 분야인 ‘미술’ 교원이다. 조사 과정에서 정광균 씨(1945, 고베 조선고급학교 11기생)를 만나게 되었고, 아오야마 선생에 관해 상세히 알 수 있었다.

먼저 아오야마 선생에 대해 알려주신 하상철 씨의 경력부터 쓰자.
아버지 하단영(河旦永), 어머니 박학순(朴鶴順)의 장남으로 3월 6일,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생후 몇 개월 만에 교토로 왔다가 해방된 후 일단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생활이 어려워 밀항으로 다시 일본에 건너왔다. 시가현의 조선인 거리에서 살며 아즈치(安土)조선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해방은 7, 8세 때였는데 한 차례의 귀향과 재차 도일한 까닭에 주위 아이들보다 늦게 조선학교에 입학한 하 씨는 민족교육 사수 투쟁이었던 1948년의 교육투쟁도 기억하고 있었고, 조선학교에서 같은 처지의 동포와 만났던 기쁨도 필자에게 말해주었다.
1952년부터 현재의 니시(西)고베 조선초급학교(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 소재)에 다녔다. 여기서 미술의 재미를 가르쳐준 이가 아오야마 선생이다. 하 씨는 1953년부터 현재의 교토 조선중고급학교에 다녔고, 이곳에서 미술교원으로 일한 재일조선인 미술가 1세 전화황(全和凰 1909-1996) 씨와 만난다. 이 만남은 하 씨가 미술가의 길을 걷게 하는데 결정적이었다. 현재의 무사시노(武蔵野)미술대학에 다녔고, 졸업한 후에는 교토에서 재일동포 문화활동을 정력적으로 이끌었다.


나가타(長田) 그리고 다루미즈(垂水)의 조선학교 교단에
여기까지 조사한 필자는 하 씨의 작품을 전시한 ZAHPA 제1회 컬렉션 전시회(월간 이어 2020년 2월호 참조)를 개최하면서 아오야마 선생에 관해 조사를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정광균(鄭光均) 씨를 알게 되었다. 정 씨는 은사인 아오야마 선생의 삶을 조사해 지금까지 몇 차례의 전람회도 개최했다. 정 씨가 정리한 내용, 필자가 수집한 자료와 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오야마 선생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야마가타(山形) 현 오키타마(置賜) 군에서 태어났고, 전쟁 중에는 보루네오 섬으로 파견되었다. 전후에는 고베에 살며 마노(真野)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8년부터 이 학교 맞은편에 있는 현재의 니시(西)고베 조선초급학교로 직장을 옮겨 미술수업과 미술부를 지도, 더불어 사회연구부를 지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학교에 가마를 설치해 학생들과 함께 오카리나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나중에는 단바(丹波)에 있는 타치쿠이야키(立杭焼) 도자기 가마를 이용하기도 했다.
1950년대 말부터 현재의 고베 조선고급학교(효고현 고베시 다루미즈구, 나가타구에서 이전)에서 교단에 섰고, 여름에는 미술부 부원들과 함께 캠핑을 떠나(단바 스미요시 신사에서 숙박), 작품 제작을 지도하고 반합에 식사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제자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사상과 역사, 사회제도에 대해 친절히 알려주고, 이론과 토론, 이성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었다.

교육자이면서 동시에 작품 제작도 꾸준히 해서 제7회 일본 언디펜던 전시회에 출품도 했다.(참고 : 일본 언디펜던전, 출품목록 및 ‘조선미술’ 제3호. 모두 1954년 발행) 또한 다른 자료에 따르면 재일조선인 아이들의 동아리였던 ‘물레방앗간’을 지도하기도 했다(참고 <일본판화신문> 제14호, 1954년 발행). 또 이 동아리에서는 ‘조선민족 무용’이라는 작품도 제작한 것 같다(참고 : ‘아카하타’신문 1955년 1월 1일자).
자신이 전쟁에 가담했던 것에 대한 속죄의 의미에서 조선인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으며 판화를 통해 인성교육을 하고, ‘나쁜 짓만 안 하면 된다’라며 미술부를 찾아온 학생을 따듯하게 맞아주었던 아오야마 선생. 앞으로도 아오야마 선생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찾고 싶다.
*월간 <이어> 2022년 6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