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시리즈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69 도쿄 조선제3초급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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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기의 우리학교 vol.69 도쿄 조선제3초급학교
함께 성장하고 지켜온 장소
2020년에 창립 75주년을 맞아 새 교사를 준공한 도쿄 조선제3초급학교(이타바시 소재).
해방 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동포의 개인주택에서 출발한 배움터가 학교로 발전한 경위, 또한 그 후 교육현장을 지켜온 동포들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 1960년대 학교생활 모습 -
- 아파트를 개조한 교사(1947~1962년까지 사용), (<도쿄 조선제3초급학교 창립 75주년 새 교사 건설기념지>에서) -
연령과 상관없이 다함께 모여 ‘아야어여’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2월 8일, 후에 초대교장이 되는 최광석 씨가 자택(이타바시板橋 오타니구치大谷口 소재) 옆에 16평짜리 집을 짓고, 더불어 자택에 있는 3평 남짓한 방 하나도 교실로 제공했다. 교원 2명, 학생 25명이 모여 국어강습소 형태의 <이타바시 조선학원>이 만들어졌다.
“샤쿠지이(石神井)부터 호야(保谷) 주변, 한노우(飯能)에서 온 사람도 있었어요.…1학년이든 6학년이든 상관없었죠. 그때 내가 12세였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꽤 많았어요. 15~6세 정도 되는 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야-어-여’는 다들 처음이었어요. 10시 경에 시작해서 점심은 적당히 도시락 같은 걸 먹고, 2시나 3시쯤까지 공부했는데, 과목은 주로 국어와 역사입니다.”(배정환 씨, <체험기록편>에서)
한편, 1947년에는 도요시마구(豊島區)에 있던 콩나물공장의 창고를 빌려 <도요시마 조선초등학원>이 개설되었다. 교원을 역임한 정구일 씨의 수기에는 “1947년부터 나 혼자 3부제(1‧2학년, 3‧4학년, 5‧6학년) 복식형태로 50여명을 가르쳤다. 같은 해 12월 17일, 도요시마초등학원은 이타바시 초등학원과 병합되어 도쿄 제3 조련초등학교가 된다. 내가 아동 48명을 데리고 이타바시 초등학원으로 갔다. 그때 오르간 1대도 들고 갔다. 전교생은 131명, 교원 4명이다. 현재의 도쿄조선 제3초급학교의 전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학교건물은 목조 아파트를 사들여 개조해 마련했고(현 소재지), 교명은 <도쿄 제3 조련초등학교>로 개칭했다. 그런데 1948년 4월, 이 학교에 폐쇄령이 내려진다. 보호자가 중심이 된 동포들이 폐쇄령 철회를 요구했으나 이후 학교관계자가 체포당하고 만다.
1949년 10월 19일, 일본정부가 ‘학교폐쇄령’을 발표해 12월에 이 학교는 강제로 도쿄도립학교가 된다(일본인 교장‧교원이 부임, 학생 195명. ※조선인 교원은 시간강사만 인정함).
“교장과 담임교사가 조선인, 일본인 1명씩, 졸업증서도 2개를 만드는 상황이었다.…아이들도 ‘일본인 선생님 싫다’고 해 일본인 교사가 하는 수업을 거부하기도 했다. 일본교사들도 그런 모순을 인식하고 있었다.”(정구일 씨, <증언편>에서)
“우리가 만든 학교”
그 후 총련 결성(1955년 5월 25일) 준비과정에서 ‘도립 존속’이냐 ‘사립 이관’이냐를 둘러싸고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졌고, 자주적으로 학교를 운영하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1955년 3월에 ‘도립 제도’가 폐지되기도 해 민족교육의 주체성을 되찾았다.
이 학교는 1954년 9월~12월까지 학교 개축공사를 위해 264명의 아이들을 판잣집, 동포의 자택, 일부는 야외 등으로 분산해 수업을 했고, 준공 후에 <도쿄 조선 제3초급학교>로 새롭게 출발했다.
또 1957년에 조국(북)에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오면서 우리가 직접 학교를 운영하는 체제를 확립하자며, 한승원 씨와 김상기 씨 등이 중심이 되어 <육영회>를 결성한다. 모금운동도 전개해 큰 성과를 얻었다. 학교 독자적인 <육영회>는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운영되며 학교운영에 공헌했다.
더불어 1962년에는 지역동포들의 힘으로 철근건물 3층의 새 교사를 건설한다. 12월 8일, 준공식이 열렸다. 학교가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 아이들이 옥상에 뛰어올라가 둘러보며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용돈을 절약해 1엔 기부를 하고, 우리 교사들도 급여를 몇 번 나눠서 건설기금을 냈습니다. 부모들의 부담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새 교사로 옮겨갔을 때는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참여해 만들었다는 실감이 들었습니다.(강추연 씨, <증언편>에서)
1963년 이후에는 새 교사에서 ‘하계학교’도 실시되어 일본 학교에 다니는 동포 아동 수십 명이 민족의 말과 문화와 친근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 옛 목조건물 시절의 학교, 체육수업. 1970년대 사진※<도쿄 조선 제3초급학교 창립75주년 새 교사 건설 기념지>에서) -
입장이 달라지더라도 이어나가고 싶다
1970년대 초반까지 동포사회의 정세 때문에 일본 각지의 일부 조선학교는 자주적인 운영이 곤란한 시기가 있었다. 도쿄제3학교에서는 1973년에 교장으로 부임한 강영주 씨(84)가 개혁을 단행, 원래 교육이 지녀야 할 본연의 자세로 전환한다. 먼저 교원들에게는 원칙과 규율을 준수하고, 교원으로서 자부심과 실력을 갖추도록 열심히 전달했다.
“그렇게 교원들의 실력과 품격이 연마되고, 학업뿐만 아니라 클럽활동과 학교생활에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부문별로 모범상도 다양하게 수상했거든요. 그러한 변화를 봐서인지 학부모들도 매우 협조적이었어요. 예를 들면 언젠가 어느 학부모가 집으로 초대했는데, 학교에서 일어난 일 중 해결해야 할 과제를 지적해주었어요. 교원, 자녀, 보호자 사이에 끈끈한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갔다고 생각합니다.”
고행수 씨(70)도 그런 변화를 피부로 느낀 교원 중 하나였다. 고씨는 고3 때 이바라기 조선초중고급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조선대학교 사범과에 진학, 졸업과 동시에 18세에 도쿄 제3학교로 부임해 34년간 교원생활을 했다.
“인상 깊은 것은 운동회입니다. 학교에는 작은 운동장이 있었는데, 아동 수가 300명 정도였기 때문에 운동회는 도쿄 중고교 운동장을 빌려서 했습니다. 운동회는 동포들에게도 축제 같은 것이죠. 이타바시(板橋), 도요하시(豊橋), 네리마(練馬), 기타(北) 등… 거주지역별로 경쟁해서 아이들뿐만 아니라 ‘동포들의 운동회’이기도 했습니다.”
또 체육관과 강당도 없었기에 학교 3층은 모든 교실의 벽을 분리해 하나의 공간이 되도록 만들고 공연과 행사를 할 때는 교원들이 벽을 이동시켜 무대를 만들었던 일도 그립다고 한다.
“우리학교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교원과 보호자도 성장하는 장소다. 동포사회와 학교를 지키는 인재로 성장한다. 여기엔 지역 동포들도 함께한다. 그러니 졸업생도 그렇고 한번 연을 맺은 사람이라면 입장이 달라져도 학교를 지키고 싶고, 학교와 연결되어 있고 싶고,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지금도 학교가 이 장소에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고행수 씨)
*월간 <이어> 2022년 11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