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봅시다

조선학교는 어떤 곳?

역사

조선이 해방을 맞은 1945년. 일본 땅에 있던 재일조선인들은 귀국의 설렘을 안고 ‘국어강습소’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쳐 고향에 돌아가도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해방을 맞은 해 연말, 일본 전역에 국어강습소가 500여 곳에 달할 만큼 부모들의 교육열은 뜨거웠습니다. 귀국 붐이 일었던 1945년 10월, 재일조선인의 권리와 생활지원을 위해 ‘재일조선인연합(이하 조련)’이 만들어졌고, 무엇보다 민족교육에 힘쓴 조련 활동가들에 의해 ‘국어강습소’에서 ‘조선인학교’라는 체계적인 학교로 변모해 갑니다. 해방된 지 2년 후인 1947년에는 조선초등학교 541개교(학생 56,961명, 교원 1,250명), 중등학교 22개교(학생 1,537명, 교원 81명)나 되는 민족교육 체계가 구축되었습니다. (조선대학교는 1956년 4월 창립)


1948년 4월, 효고현을 중심으로 일본 전역으로 확산한 ‘4·24 교육투쟁’과 1949년 제2차 조선학교 폐쇄령을 거치며 5년간의 암흑기(공립 조선인학교, 일본 학교의 분교, 일본 학교 내의 조선인 학급, 방과후 수업, 자주학교 등의 다양한 형태)에 접어든 조선학교는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이하 조총련)’의 결성과 1959년부터 시작된 북으로의 ‘귀국사업’을 계기로 부활하게 됩니다.


1961년, 일본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60여 개 조선학교가 존재했습니다. 조선학교 부활 사업은 가난한 재일조선인에게는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학교 건물도 책상도 교과서도 변변히 없었습니다. 일찍이 재일조선인을 ‘해외공민’으로 인정한 북은 1957년 ‘교육원조비와 장학금 1억 엔’과 교과서 등을 보내며 민족교육 지원을 시작했고, 이러한 지원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 정부는 재일동포의 민족교육을 철저히 외면해 왔습니다. 이것이 지금도 조선학교가 북을 ‘진정한 조국’으로 여기는 까닭입니다.


법적지위와 학제, 교육이념

2018년 현재 조선학교는 일본 전국에 64개교가 남아있고, 유,초,중,고,대학교까지 정연한 민족교육 체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초기 4만여명에 달하던 조선학생은 약 7,000여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일본 교육법에 준하는 ‘각종학교’(1조교, 전수학교의 다음)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지자체로부터 적정량의 교육보조금을 받습니다. 학교의 재정은 전적으로 수업료와 동포들의 기부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북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은 계속되고 있으나 매년 1억엔 정도로서 현재의 가치로는 ‘교과서’ 제작과 인쇄에 그칩니다. 최근 줄어드는 학생수와 지자체의 교유보조금 동결, 일본 정부의 제도적 차별 등 많은 요인이 겹쳐 학교 재정은 악화일로입니다.

학제는 우리나라와 동일한 6,3,3,4제로 되어있습니다. 수업내용은 조선학교 초기부터 현재까지 변화하는 한반도와 일본사회, 재일조선인 사회에 발맞추어 꾸준히 변모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귀국’을 전제로 한 교육이었다면 현재는 일본에의 ‘정주’를 전제로 한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국어, 역사, 사회 등 일부 민족교육 정통성 유지를 위한 수업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일본학교와 유사합니다. 수업은 ‘일본어’ 수업을 제외하면 모두 우리말로 진행됩니다.

조선학교는 집단경쟁, 집단주의교육을 주요 교육방향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일본학교에서 편입해 온 학생을 위해 교과서를 일본말로 번역해주는 옆 동무, 우리말 100퍼센트 운동 달성을 위해 모두가 일정기간 하루 종일 우리말로만 대화할 때 우리말이 서툴러 말을 못하는 동무를 위해 학급 동무들과 협의하여 그 동무만 면제 해주기, 무지각 무결석 운동을 학급차원에서 달성하기 위해 지각과 결석이 잦은 동무를 순번을 정해 동행 등교하기, 학습 성적 또한 개인성적 뿐 아니라 학급평균으로 다른 학교, 다른 학급과 경쟁하기 등등. 조선학생 스스로 우리학교의 장점은 무엇인지 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가 실현되는 학교인 것입니다.


조선학교가 받아왔던 다양한 차별

1) 4.24 한신교육투쟁과 조선학교 폐쇄령

해방 직후 ‘국어강습소’를 체계적인 민족교육으로 정비했던 세력은 일제시기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을 점령했던 연합국총사령부(GHQ)의 맥아더 사령관은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공산당의 중심세력인 ‘조련’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1948년 1월 14일 문부성 통달을 이용하여 ‘조선학교 폐쇄령’을 내립니다.

격렬하게 저항한 재일조선인들은 4월 24일 효고현 1만 5천 동포들이 지사의 ‘양해’를 얻어냄으로써 민족교육을 인정받는 쾌거를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효고현 일대에 GHQ의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투쟁을 주도했던 재일조선인이 대대적으로 검거되었습니다. 이틀 후 이를 항의하며 오사카 동포들이 오사카 공원에서 펼친 시위에서 16살 김태일 소년이 총격에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동포 3천명이 검거되고 213명이 검거되었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일본정부는 한발 물러서 ‘각서’를 교환하여 ‘조선학교의 자주적 교육’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한신교육투쟁’ 또는 ‘4.24 교육투쟁’ 입니다.

이후 1949년 GHQ는 또다시 ‘단체 해산’을 명하며 이번에는 군화발과 곤봉을 들고 ‘조선학교’와 ‘조련’을 패쇄, 해산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2) 각종학교 인가획득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이 점령상태에서 벗어나자 일본정부는 조선학교에 대해서 ‘외국인 자녀로서 일본학교에 취학의무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전에는 조선학교가 자주적인 교육을 할 수 없다며 일본학교로 모두 취학시키더니 이제는 ‘일본인이 아니니 알아서 해라’는 것입니다.

조선학교가 폐쇄되어 ‘공립조선인학교, 도립조선인학교, 일본학교의 분교’ 형태로 운영되었던 것인데 그동안 국가와 현이 운영해 왔으면서 갑자기 모든 지원과 관리를 끊어버렸습니다. 조선학교를 지키기 위해 동포들은 스스로가 운영하고 아무 간섭을 받지 않도록 ‘각종학교 인가’ 획득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53년 교토조선학원(7개교)를 시작으로 20여년이 지난 1975년 산요조선초중급학교(현재 오카야마 조선초중급으로 통합)를 마지막으로 155개교가 모두 인가를 취득하였습니다.

일본정부는 조선학교의 각종학교 지위조차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나 각종학교 인가 권한은 원래 지자체 장에게 있었습니다. 60년대 도쿄도 지사로 있었던 미노베 지사(조선대학교 인가)처럼 정부의 탄압과 우익인사들의 협박에 저항했던 의식있는 지자체 장들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3) JR정기통학권 할인율 차별

일본학생의 통학 정기운임은 성인요금을 기준으로 고교생은 10%, 중학생은 20%, 초등학생은 65%를 할인했습니다. 조선학교 학생은 12세 미만은 50% 할인, 12세 이상은 성인요금을 내야했습니다.

이러한 차별에 처음으로 시정운동을 벌인 것이 ‘치바조선초중급학교 어머니회’였습니다. 어머니들은 JR측에 시정요청을 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조선학교는 1조교가 아니기 때문에 같은 할인율을 적용할 수 없다’ 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어머니들은 가나가와, 히로시마, 도쿄 등 전국적으로 운동을 전개해 60만 명의 서명을 받아냈습니다.

이에 국회의원, 지자체 지사들, JR노동조합, 각종 시민단체들의 협력과 우호적인 여론이 움직여 1994년 2월 21일 마침내 JR측이 동일 할인율을 적용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4) 조선고급학교의 전국 스포츠 공식대회 출전 자격 문제

조선학교는 일본교육법이 정하는 1조교가 아닌 ‘각종학교’ 이므로 고등학교체육연맹(고체련)이 주최하는 일본고교 스포츠 공식대회에 출전자격이 없었습니다.

1990년 5월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여자배구부를 둘러싼 해프닝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고체련의 행정실수로 3월 춘계대회에 참가한 배구부가 1차 예선을 통과했는데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고체련 측이 ‘대회참가 불가’를 통보했습니다. 이에 항의하며 6월부터 8월에 걸쳐 전국 조선고교 12개교가 고체련에 가맹신청서를 제출하며 본격적으로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일본에 사는 고교생입니다. 우리는 억울한 심정이지만 후배들에게는 이러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당시 배구부 주장 조일순 씨의 호소입니다.

이 운동은 일본학생들과 교원, 변호사들의 호응을 얻어 마침내 1993년 5월 고체련 이사회에서 조선학교를 비롯한 외국인학교의 공식대회 참가가 인정되었습니다. 이후 1996년부터 모든 공식대회에 참가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현재 조선학교는 럭비, 축구, 권투 등 다양한 스포츠 공식대회에서 일본의 도도부현 대표로 출전하며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조선학교는 정식 가맹이 아니라 준가맹의 처지에 놓여 있는 실정입니다.



5) 대학수험 자격문제

문부성은 학교교육법을 구실로 조선학교를 포함한 비1조교 외국인학교 졸업생에게 대학수험자격을 주지 않았습니다. 조선학생들은 우리나라 ‘검정고시’에 해당하는 ‘자격시험’을 합격해야 일본 국공립대학에 입학 시험을 칠 수 있습니다.

1994년 교토에서 <민족학교 출신자의 수험자격을 요구하는 전국연락협의회>가 결성되어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1998년 교토대학 대학원이 국립대 최초로 조선대학교 졸업생의 수험자격을 인정했습니다.

2003년 문부과학성은 외국인학교 중 인터내셔널 스쿨에만 수험자격을 부여하는 <아시아계 배제> 방침을 발표했고,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결과 아시아계도 포함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조선학교는 <본국과의 교육과정 관계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자격 유무를 ‘개별대학의 심사’에 맡긴다고 발표합니다. 일본정부의 이 같은 조선학교 배제는 이후 고교 무상화 제외, 교육보조금 동결 등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조선학교 졸업생은 90퍼센트가 넘는 일본 국공사립대학의 입학자격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6) 에다가와(도쿄제2초급) 조선학교 토지 재판

2003년 12월 도쿄도는 에도가와구 에다가와의 도쿄조선제2초급학교 운동장 일부 반환과 4억 원의 배상금을 요구하며 학교 측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전쟁 전 조선인이 살았던 에도가와 시오자키 지역이 <도쿄올림픽> 주 경기장으로 결정되면서 1941년, 도쿄도가 쓰레기 매립지였던 이 지역으로 조선인을 강제 이주시켜 형성된 곳이 바로 에다가와 조선인 마을이었습니다. 여기에 조선사람들은 학교를 지어 도쿄제2조선초급학교라 했습니다.

동포들은 이런 역사적 경위를 이해해 준 당시 도쿄도의 협조로 학교 부지를 저렴하게 빌려 쓰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2003년 도쿄도의 이시하라 신타로 도지사의 태도가 돌변한 것입니다.

이 소송은 조선학교 측을 응원하는 많은 일본시민들, 재일동포 당사자들, 변호사들, 한국 시민들의 연대가 힘이 되어 도쿄도와의 화해가 성립되었습니다. 2007년 3월, 토지 4천 평방미터를 시가의 10% 금액인 이른바 ‘화해금’으로 학교가 구입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이후 조성된 모금액으로 학교는 부지를 사들여 현재의 지역으로 새 교사를 지어 이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한국 시민들이 힘을 보탠 최초의 사례가 되었습니다.



7) 교토 조선제1초급학교 습격 사건

2009년 ‘재일의 특권을 허락하지 않는 시민모임’(이하 재특회) 회원들이 교토 조선제1초급학교 정문으로 몰려와 “조선인은 일본에서 나가라” , “스파이의 자식들” 등 혐오발언을 내뱉으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주민들의 양해를 받아 오랫동안 사용해 온 학교 앞 마을 공원을 조선학교가 수업 등으로 장기간 <불법점거>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수업 중이었던 어린 학생들은 재특회의 확성기를 통해 그 무서운 욕설과 발언들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습니다. 분노한 보호자들과 학교측은 형사, 민사 양쪽으로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릅니다.

4년 이상을 끌어 온 재판에서 결국 형사재판부는 4명의 피고에 대해 위력업무방해죄, 모욕죄를 선고했고 민사재판에서는 습격행위를 <인종차별>로 판결하여 1,226만 엔의 배상금 지불과 학교 반경 200미터 내 접근을 금지시켰습니다.

2014년 12월 9일 최고재판소는 피고 측 (재특회)의 상고를 기각하여 판결이 확정되었습니다. 이 재판은 일본사회에 혐오, 증오 발언의 심각성을 문제제기하고 재특회의 본질을 밝히고 이에 대항하는 세력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조선학교에 대한 일본정부 및 민간의 차별은 그 발생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부터 한반도에 어떤 식으로든 긴장관계가 생기기만 하면 여지없이 조선학생들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치마저고리 칼질 사건’ 입니다. 1989년 KAL기 폭파사건, 1994년 미사일 위기, 2002년 납치문제 등 때마다 어린 여학생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학교에는 상시적으로 학생들을 위해하겠다는 협박전화가 걸려옵니다. 심할 때는 학생들의 통학버스에 쓰여있는 ‘조선학교’ 라는 글씨조차 테이프로 붙여 보이지 않게 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민간에서 저지르는 위협행위를 방조하고 거드는 것이 바로 정부의 법적 제도적 차별 행위입니다. 조선학교에는 기부를 해도 세금면제 해택을 받을 수 없으며, 학교 앞 스쿨 존도 설치해 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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