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직후 ‘국어강습소’를 체계적인 민족교육으로 정비했던 세력은 1945년 10월에 창립된 ‘재일조선인연맹(조련)’ 소속의 동포들이었습니다. 조련의 활동가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세력, 사회주의, 노동운동 세력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을 점령했던 연합국총사령부(GHQ)의 맥아더 사령관은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공산당의 중심세력인 ‘조련’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1948년 1월 14일 문부성 통달을 이용하여 ‘조선학교 폐쇄령’을 전국의 지자체에 내립니다.
재일조선인의 격렬한 저항은 오카야마,효고,오사카,도쿄 등 전국적으로 번졌습니다. 4월 24일 1만 5천명의효고현 동포들이 현청을 에워싼 채 시위하면서 체포된 동포들을 석방하고학교폐쇄령을 철회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이날 조선인 대표단과 지사가 면담하여 구속자를 전원석방하고 폐쇄령을 철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11시 고베시 전역에 GHQ의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투쟁을 주도했던 재일조선인 1,973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이틀 후 이를 항의하며 오사카 동포들이 오사카 공원에서 펼친 시위에서 16살 김태일 소년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습니다.
1948년 1월부터 5월까지 투쟁에는 합계 100만명이 참가해 약 2,900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군사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의 형기를 합하면 116년에 달한다고 합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일본정부는 한발 물러서 ‘각서’를 상호 교환하고 부분적으로 조선학교의 자주적 교육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투쟁을 가리켜 이른바 ‘한신교육투쟁’ 또는 ‘4∙24교육투쟁’이라 부릅니다.
이후 1949년 연합국 총사령부(GHQ)는 또다시 ‘단체 등 해산령’을 내려 재일조선인연맹을 강제 해산하고 군경을 동원해 조선학교 또한 강제 폐쇄했습니다. 일본정부는 조선학교의 부지,교사 등을 몰수하고 이를 공립학교로 만들었습니다. 도쿄도에서는 도립조선인학교, 다른 지역은 일본공립학교의 분교, 일본학교 내의 조선인학급, 또는 특별학급, 방과후 민족수업 등 다양한 형태로 조선학교를 공립화했습니다. 원래 일본정부는 조선학생을 일본학교에 개인별 분산 입학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재일조선인들은 집단으로 입학하기를원했습니다. 비록 학교가 폐쇄되어 일본학교로 가더라도 같은 학급, 같은 분교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민족성을 유지하고 차별을 견딜 수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어떤 조선학교는 일본정부의 폐교에도 굴하지 않고 ‘자주학교’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1952년 4월 28일,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자 일본은 연합국군의 점령상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 즉시 일본정부는 ‘외국인등록법’을 제정하여 재일조선인의 일본국적을 일방적으로 박탈했습니다. 이어서 조선학교 문제도 다시 도마에 오르게 됩니다. 이전에는 일본인과 같은 입장이니 ‘독자적인 민족교육’을 할 수 없다면서 강제 폐쇄시키더니, 이번에는 ‘일본국적이 없는 외국인이 되었다’며 일본의 교육제도에서 강제로 제외했습니다. 따라서 조선학교는 공립, 분교, 일본학교 내의 특별학급의 형태로 있다가 갑자기 모든 학교가 ‘자주학교’로 내몰리게 됩니다. 이는 당국의 지원 즉,국고보조금이 모두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했고 심각한 재정난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포들은 조선학교를 ‘사립학교’로 이전하고자 했으나 일본정부는 사립학교 인가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조선학교 관계자들은 지자체 장이 인가 권한을 가진 ‘각종학교’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1953년 교토조선학원(7개교)를 시작으로 20여년이 지난 1975년 산요조선초중급학교(현재 오카야마조선초중급학교로 통합)를 마지막으로 155개교가 모두 각종학교 인가를 취득하였습니다.
일본정부는 1960년대, 1980년대 두번에 걸쳐 이 각종학교 인가 권한을 문부성이 가져가는 ‘외국인학교 법안 개정안’을 통해 다시 조선학교를 말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동포들의 저항과 일본시민의 참여로 무산시켰습니다. 1960년대 도쿄도 지사로 있었던 미노베 지사는 일본정부의 탄압과 우익인사들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대학교를 각종학교로 인가했습니다. 미노베 지사와 같은 혁신 지자체 장과 시민사회의 힘이 조선학교를 지키는데 큰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일본학생의 통학 정기운임은 성인요금을 기준으로 고교생은 10%, 중학생은 20%, 초등학생은 65%를 할인했습니다. 조선학교 학생은 12세 미만은 50% 할인, 12세 이상은 성인요금을 내야했습니다.
이러한 차별에 처음으로 시정운동을 벌인 것이 ‘치바조선초중급학교 어머니회’였습니다. 어머니들은 JR측에 시정요청을 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조선학교는 1조교가 아니기 때문에 같은 할인율을 적용할 수 없다’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어머니들은 가나가와, 히로시마, 도쿄 등 전국적으로 운동을 전개해 60만 명의 서명을 받아냈습니다.
이에 국회의원, 지자체 지사들, JR노동조합, 각종 시민단체들의 협력과 우호적인 여론이 움직여 1994년 2월 21일 마침내 JR측이 조선 학생에 대해서도 일본 학생과 동일한 할인율을 적용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조선학교는 일본교육법이 정하는 1조교가 아닌 ‘각종학교’ 이므로 고등학교체육연맹(고체련)이 주최하는 일본고교 스포츠 공식대회에 출전자격이 없었습니다.
1990년 5월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여자배구부를 둘러싼 해프닝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고체련의행정실수로 3월 춘계대회에 참가한 배구부가 1차 예선을 통과했는데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고체련 측이 ‘대회참가 불가’를 통보했습니다. 이에 항의하며 6월부터 8월에 걸쳐 전국 조선고교 12개교가 고체련에 가맹신청서를 제출하며 본격적으로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일본에 사는 고교생입니다. 우리는 억울한 심정이지만 후배들에게는 이러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당시 배구부 주장 조일순 씨의 호소입니다. 이 운동은 일본학생들과 교원, 변호사들의 호응을 얻어 마침내 1993년 5월 고체련 이사회에서 조선학교를 비롯한 외국인학교의 공식대회 참가가 인정되었습니다. 이후 1994년 권투에 12명의 조선고교 선수가 출전한 것을 시작으로 1996년까지 고체련 주최의 전경기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조선학교는 럭비, 축구, 권투 등 다양한 스포츠 공식대회에서 일본의 도도부현 대표로 출전하며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조선학교는 정식 가맹이 아니라 준가맹의 처지에 놓여 있는 실정입니다.

문부성은 학교교육법을 구실로 조선학교를 포함한 비1조교 외국인학교 졸업생에게 대학수험자격을 주지 않았습니다. 조선학생들은 우리나라 ‘검정고시’에 해당하는 ‘자격시험’을 합격해야 일본 국공립대학에 입학 시험을 칠 수 있습니다.
1994년 교토에서 <민족학교 출신자의 수험자격을 요구하는 전국연락협의회>가 결성되어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1998년 교토대학 대학원이 국립대 최초로 조선대학교 졸업생의 수험자격을 인정했습니다.
2003년 문부과학성은 외국인학교 중 인터내셔널 스쿨에만 수험자격을 부여하는 <아시아계 배제> 방침을 발표했고,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결과 아시아계도 포함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조선학교는‘본국과의 교육과정 관계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자격 유무를 ‘개별 대학의 심사’에 맡길 것을 발표했습니다.현재 일본국공사립대학의90퍼센트 이상이 조선학교 학생의 입학자격을 ‘대학자체의 심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정부가 해야할 일을 대학에 떠 맡긴 꼴입니다.
일본정부의 이 같은 조선학교 배제는 이후 고교 무상화 제외, 교육보조금 동결 등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2003년 12월 도쿄도는 에도가와구에다가와의 도쿄조선제2초급학교 운동장 일부 반환과 4억 원의 배상금을 요구하며 학교 측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전쟁 전 조선인이 살았던 에도가와시오자키 지역이 도쿄올림픽의 주 경기장으로 결정되면서, 1941년 도쿄도가 쓰레기 매립지였던 이 지역으로 조선인을 강제 이주시켜 형성된 곳이 바로 에다가와 조선인 마을이었습니다.여기에 조선사람들이 만든 학교가 도쿄제2초선초급학교입니다.
동포들은 이런 역사적 경위를 이해해 준 당시 도쿄도의 협조로 학교 부지를 저렴하게 빌려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3년 도쿄도의 이시하라 신타로 도지사의 태도가 급변한 것입니다.
이 소송은 조선학교 측을 응원하는 많은 일본시민들, 재일동포 당사자들, 변호사들, 한국 시민들의 연대가 힘이 되어 도쿄도와의 화해가 성립되었습니다. 2007년 3월, 토지 4천 평방미터를 시가의 10% 금액인 이른바 ‘화해금’으로 학교측이 구입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이후 조성된 모금액으로 학교는 부지를 사들여 현재의 지역으로 새 교사를 지어 이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한국 시민들이 힘을 보탠 최초의 사례가 되었습니다.

2009년 ‘재일의 특권을 허락하지 않는 시민모임’(이하 재특회) 회원들이 교토 조선제1초급학교 정문으로 몰려와 “조선인은 일본에서 나가라” , “스파이의 자식들” 등 혐오발언을 내뱉으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주민들의 양해를 받아 오랫동안 사용해 온 학교 앞마을 공원을 조선학교가 수업 등으로 장기간 ‘불법점거’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당시 수업 중이었던 어린 학생들은 재특회의 확성기를 통해 그 무서운 욕설과 발언들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습니다. 분노한 보호자들과 학교측은 형사, 민사 양쪽으로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릅니다. 4년 이상을 끌어온 재판에서 결국 형사재판부는 4명의 피고에 대해 위력업무방해죄, 모욕죄를 선고했고 민사재판에서는 습격행위를 ‘인종차별’로 판결하여 1,226만 엔의 배상금 지불하게 하고학교 반경 200미터 내 접근을 금지시켰습니다.
2014년 12월 9일, 최고재판소는 피고 측(재특회)의 상고를 기각하여 판결이 확정되었습니다. 이 재판은 일본사회에 혐오및 증오 발언의 심각성을 제기하고 재특회의 본질을 밝히며, 이에 대항하는 세력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조선학교에 대한 일본정부 및 민간의 차별은 그 발생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부터 한반도에 어떤 식으로든 긴장관계가 생기기만 하면 여지없이 조선학생들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치마저고리 칼질 사건’ 입니다. 1989년 KAL기 폭파사건, 1994년 미사일 위기, 2002년 납치문제 등 때마다 어린 여학생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학교에는 일상적으로 학생들을 위협하는협박전화가 걸려옵니다. 심할 때는 학생들의 통학버스에 쓰여있는 ‘조선학교’ 라는 글씨조차 테이프로 붙여 보이지 않게 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민간에서 저지르는 위협행위를 방조하고 거드는 것도 바로 정부의 법적 제도적 차별 행위입니다. 조선학교에는 기부를 해도 세금면제 혜택을 받을 수 없으며, 학교 앞 스쿨 존도 설치해 주지 않습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 센다이시 소재 ‘도호쿠조선초중급학교’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아직 일본의 적십자사가 변변한 구호물자도 지급하지 못했던 때였습니다. 전국의 재일조선인들은 학교와 동포를 지키겠다고 끊어진 도로를 넘고 넘어 물자를 조달했습니다. 덕분에 산더미처럼 쌓인 구호물자로 센다이의 조선사람들은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지역 일본인들은 구호시설조차 없었습니다. 빠르게 물자가 확보되었던 조선사람들은 자신들의 식사를 아껴 김밥과 따뜻한 국을 끓여 다른 피난민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일은 당시 지역신문에도 대서특필되어 미담으로 회자되었습니다. 차별의 대상이기만 했던 재일조선인들이 이번에는 그 차별의 주체였던 일본인들을 도운 것입니다. 지진의 여파가 잦아들 즈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단 20명 남짓한 이 조선학교에 센다이시에서 교육보조금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어찌 은혜를 원수로 갚는가?’ 동포들은 분노했습니다.
조선학교는 일본의 학교교육법 제1조에 해당하는 학교 즉, 1조교(공립, 사립학교)가 아닌 ‘각종학교’의 위치에 있습니다. 중앙 정부기구인 문부과학성 대신이 인가 권한을 가진 1조교에 비해 지자체 장이 인가권을 가지는 각종학교는 교육 내용에서 자주성을 견지할 수 있습니다. 비록 1조교 처럼 대폭적인 정부지원을 받지는 못하지만 소액의 교육보조금을 지자체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교육보조금 동결, 중지의 사태’는 단순히 센다이 시뿐 아니라 그 전부터 일본 전역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한창 고교무상화 문제가 대두되던 2010년 오사카부 하시모토 토오루 지사가 지자체 교육보조금 지급을 정지했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도쿄도 이시하라 신타로 또한 조선학교에 교육보조금 지급을 중단했습니다. 연이어 사이타마, 미야기, 치바로 도미노 현상이 되어 점점 중단되었습니다.2010년 이후 14개 현, 11개 시,총 35개교가 보조금 지급이 중단된 상태입니다.조선학교를 지역별 총 64개교로 추산했을 때 반 이상이 법적으로 용인된 지자체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자체 장들이 보조금 동결의 근거로 제시한 이유는 ‘납치문제’, ‘초상화’ 등 교육내용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들이었습니다. 처음 동결을 시작한 오사카부 하시모토 토오루 지사의 경우 고교무상화가 조선학교에 유리하게 진전되는 국면에서 내린 ‘보복성 조치’ 였습니다. 결국 무상화에서 조선학교가 제외되자 많은 지자체 수장들이 앞다투어 조선학교에 보조금을 동결했습니다. 일본사회가 나침반 없이 우경화되는극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지자체 장과 지방의회의 결정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일본정부의 주도하에 노골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2016년 3월 29일 문과성은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 교부에 관한 유의점에 대하여」(이른바 3 ∙ 29 통지) 라고 이름 붙인 한통의 통지를 조선학교 소재 28개 도도부현에 내렸습니다. 그 내용은 ‘북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단체인 조선총련이 (중략) 교육내용, 인사, 재정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며 ‘조선학교에 지급하는 보조금의 공익성, 교육진행 상의 효과 등에 관한 충분한 검토’와 ‘보조금의 취지 ∙ 목적에 부합하는 적정하고 투명성 있는 집행의 확보’를 취하라는 통지였습니다.통지가 내려진 후의 기자회견에서 문과성이 차별을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문과대신은 “권한은 지자체에 있고 우리는 ‘유의점’만 전했을 뿐 감액, 정지를 지시할 수 없다”는 뻔뻔한 대답을 했습니다. 이 통지가 나온 2016년 이후 가나가와, 이바라키 등 5개 현이 보조금을 정지했습니다.
2011년 도쿄도의 보조금 정지 결정자인 이시하라 신타로 당시 지사는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서 “그것(북)에 속하는 민족, 더욱이 일본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강한 의사표시를 해 다양한 수단으로 북조선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재일조선인을 인질로 삼아 납치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공언한 것입니다. 그는 이미 도쿄도의 보조금 정지 처분을 내린 상태에서 ‘조선학교 조사보고서’라는 것을 2013년 11월에 공표합니다. 이 보고서 작성을 위한 조사에 임하면서 이시하라는 “철저하고 집요하게, 장기간에 걸쳐 닥치는대로, 수많은 인간을 붙여서” (기자회견)라 천명하며 악의에 가득찬 조사보고서를 발표한 것입니다. 해당 「조사보고서」는 지금 현재도 도쿄도 웹사이트에 게재되어 있으며 우익헤이트주의자들의 조선학교, 재일조선인 공격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오사카부는 교육보조금 비율이 조선학교 재정의 40퍼센트에 육박했으나 이 중단으로 말미암아 부내 10개의 조선학교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2012년 9월 오사카조선학원은 오사카 부와 시를 상대로 ‘보조금 중지결정 취소와 교부 의무를 요구하는 소송’을 일으켰습니다. 이 재판은 2심(2018년 3월 20일)이 패소하고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2018년 11월 28일 상고기각하여 최종 패소했습니다. 고교무상화 제외에 이어 보조금 동결까지, 일본은 행정 제도,법 제도를 이용해 정치적이고 노골적으로 조선학교를 차별하고 있습니다.
📊지방자치단체에 의한 조선학교 보조금 지급 동결 현황 (2019년 6월 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조사)
| 도도부현 | 시 | 학교 수 | 보조금 동결 연 |
|---|---|---|---|
| 도쿄도 | 홋사시 | 9 | 2010~ |
| 오사카부 | 오사카시 | 9 | 2011~ |
| 사이타마현 | 1 | 2011~ | |
| 미야기현 | 센다이시 | 1 | 2011~ |
| 치바현 | 치바시 | 1 | 2011~ |
| 히로시마현 | 히로시마시 | 1 | 2012~ |
| 니이가타현 | 1 | 2012~ | |
| 야마구치현 | 시모노세키시 | 1 | 2013~ |
| 가나가와현 | 야마토시 | 5 | 2013, 2016~ |
| 이바라키현 | 미토시, 히타치나카시, 기타이바라키시 | 1 | 2016~ |
| 도치기현 | 1 | 2016~ | |
| 와카야마현 | 1 | 2016~ | |
| 미에현 | 1 | 2016~ | |
| 군마현 | 1 | 2017~ | |
| 후쿠오카시 | 1 | 2011~ | |
| 14개 현 | 11개 시 | 35개 학교 |
2018년 6월 28일, 간사이 공항 세관이 수학여행으로 북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고베조선고급학교 학생들의 가방을 수색해 친지, 친구들에게 주려고 사 온 선물을 모두 압수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압수된 물품은 대부분 악세서리, 비누, 방석 등 기념품들이었습니다.
일본정부는 2006년 10월 14일부터 북으로부터 오는 인도적 목적을 제외한 모든 품목의 수입을 금지하는 독자제재를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인도적 목적’인 품목은 제외했으므로 조국방문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는 학생들의 기념품 몰수는 이례적이며 충격적이었고 이 뉴스는 즉시 언론과 SNS에 대대적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일본과 한국의 시민단체 중심으로 항의 기자회견, 성명, 서명운동이 펼쳐졌으며 단 며칠 만에 7,564개의 단체, 개인이 연명한 항의서한이 일본정부에 전해졌습니다. 결국 세관 당국은 9월 11일 몰수한 기념품을 반환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이 연이어 개최된 2018년의 한반도 평화 무드, 그 한가운데에 발생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더욱 충격이 컸습니다.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이 국제사회 분위기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뿌리 깊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펜데믹의 심각 상황 하에서도 조선학교는 여전히 차별의 대상이었습니다.
일본정부는 2020년 2월 말 전국 동시 휴교령을 내려 3월부터 5월까지 모든 학교가 휴교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보호자들도 불가피하게 직장을 쉬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비접촉체온계, 소독액 등의 구입비 명목으로 각 학교에 100만엔 ~ 2,000만엔 상당을 지원했고 보호자들에게는 <조성금>을 마련하여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지원금에서도 조선학교와 보호자들은 배제되었습니다. 휴교는 조선학교에도 마찬가지로 요청했으면서 지원금에서는 제외했습니다.

한편, 대학생에게는 최대 20만엔 씩 국가가 지원하는 <배움의 지속을 위한 학생지원 긴급급부금>(이하 긴급급부금)을 2020년 5월에 마련했습니다. 지급 대상에는 일본 내의 모든 대학, 일본어 교육기관, 외국대학의 일본분교까지 포함시켰습니다. 지정된 교육기관 중에는 ‘각종학교’ 조차도 아닌 곳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각종학교’ 인가를 받은 조선대학교는 이 제도에서 또다시 제외했습니다. 이에 양심적인 일본시민들도 함께 나서서 각종 항의행동을 통해 시정을 요구했습니다.
한편 UN에서는 인종차별, 외국인배척, 교육권, 이민자 인권, 소수자 문제를 담당하는 UN특별보고관 4명이 2021년 2월 19일 ‘제도에서 조선대학교를 배제하는 것은 ‘차별’에 해당하므로 이의 시정을 강하게 요구한다’는 성명을 일본정부에 제출했습니다. 이에 대한 일본정부의 대답에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조선대학교는 ‘대학교’이지 ‘대학’이 아니다. 공동성명에서 사용하고 있는 「university」에는 해당하지 않는 「각종학교」로 등록되어 있다.
2) 제도 상, 일본인 ∙ 외국인을 불문하고 「각종학교」 학생은 대상 외이며 인종 ∙ 민족 ∙ 출신국을 이유로하는 차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2020년 3월 covid-19가 전세계를 공황으로 몰고가던 즈음 마스크 부족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런 사태의 한가운데에 다시금 재일동포 어린이들에게 가혹한 차별이 발생했습니다. 사이타마 시내의 어린이 관련시설에 부직포 마스크를 배포하는 사업을 시청에서 실시하던 와중에 사이타마조선초중급학교 유치부만 제외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각계의 격렬한 항의을 받아 결국 지원에 포함은 되었으나 해결과정에서 보여준 시청의 태도가 더욱 큰 문제였습니다.
우선 부모들, 관계자들의 항의전화를 받았던 시청 직원이 조선학교가 “시의 감독 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마스크가 어떤 식으로 사용될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조선학교에 대한 혐오주의자들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었습니다. 분노한 동포들, 보호자들, 일본인들이 달려가 항의하자 담당 부장이 나와 ‘의심’ 한것을 사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배포 금지는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동포들, 일본인들, 심지어 이 소식을 들은 한국 시민사회는 시청에 항의전화, 서명운동, 마스크 모으기 등 강하게 대응했습니다.
결국 이틀 후 사이타마 시장은 조선유치원에 마스크를 배포한다고 표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조선학교가 “시의 지도감독이나 감사 대상이 아닌 각종학교(조선학교는 현의 관할)다” 그래서 애초에 배포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배포를 표명한 이유는 단지 비축 마스크가 남아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시장은 끝까지 자신의 방침을 바꾸지 않았고 이 사태에 대한 사과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한편 이 사태를 접한 한국 시민사회는 몽당연필, 정의기억연대, 김복동의 희망, 지구촌동포연대 KIN 등이 ‘조선학교 차별철폐 공동행동’을 꾸려 긴급히 항의전화, 서명운동, 마스크 모으기를 추진했습니다. 운동을 시작한지 불과 한달 만에 16,064장의 마스크와 40,221,089원이 모였습니다. 시민들의 뜨거운 동포애와 정의감을 확인하는 기회였습니다. 몽당연필은 여기에 마스크 2만장을 더해 약 3만 6천장의 마스크를 사이타마 조선학교 포함 전국의 조선학교에 보냈으며 모금액은 전국 조선학교에 비접촉체온계와소독액구입비로 지원했습니다. 그야말로 동포들, 일본 시민, 한국 시민들이 함께 한 차별 철폐의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