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카야마(和歌山) 지역에 조선인들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20세기 초반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산업화의 과정과 맞물려 있습니다. 1910년 토지조사사업과 1920년 산미증식계획 등으로 생계의 터전을 잃은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초기 와카야마(和歌山)로 이주한 남성들은 시모쓰(下津) 항구나 카이난(海南)시 등지에서 ‘토카타(土方)’라 불리는 가혹한 토목 및 건설 노동에 종사했으며, 여성들은 방적 공장에서 열악한 처우를 받으며 일했습니다. 이들은 노동 현장에서도 가혹한 환경에 노출되었는데,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미에(三重)현 경계에서 벌어진 기모토 사건이나 히다카군(日高郡)에서 발생한 가미야마지 사건 등 일본인들에 의한 끔찍한 습격과 핍박을 겪기도 했습니다.
1913년 38명에 불과했던 와카야마(和歌山)의 조선인 인구는 전시 강제 연행 및 동원 체제가 심화됨에 따라 해방 직전인 1945년에는 22,552명으로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해방 후 대다수가 귀국을 선택했지만, 불안정한 정세와 경제적 이유로 약 5,955명의 동포들이 남아 오늘날 와카야마(和歌山) 동포 사회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 재일조선인들은 빼앗긴 우리말과 역사를 되찾기 위해 전국 각지에 '국어강습소'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1948년 연합군최고사령부(GHQ)와 일본 문부성은 조선학교를 폐쇄하고 아이들을 일본 공립학교로 강제 전학시키라는 '조선학교 폐쇄령'을 내립니다.
이에 맞서 오사카(大阪)와 효고(兵庫)의 고베(神戶) 지역을 중심으로 재일조선인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민족교육 수호 운동인 '4.24 한신교육투쟁(阪神教育闘争)'이 폭발합니다. 오사카(大阪) 부청 앞 오테마에(大手前) 공원에는 수만 명이 모여 항의했고, 무장 경찰의 발포로 16세 김태일 소년이 희생되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피어린 투쟁과 헌신 속에서 와카야마(和歌山)의 동포들도 1950년대 하츠시마(初島), 미노시마(箕島), 유아사(湯浅), 신구(新宮), 타나베(田辺) 등지에 오후·야간학교를 설립하며 교육의 불씨를 지켜냈습니다. 이를 토대로 1958년 와카야마 조선제1초급학교, 1959년 와카야마 조선제2초급학교가 세워졌고, 1961년 이들이 통합되면서 현재의 '와카야마조선초중급학교'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후 1973년, 동포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자금 모금으로 현재의 나카지마(中島) 부지로 학교를 이전하며 기틀을 다졌습니다.